ㅊㅊ: 나폴리탄 괴담갤러리 유동 ㅇㅇ
나는 어느 침대에서 눈을 떴다.
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호텔 객실처럼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어젯밤, 이곳으로 들어 온 기억이 전혀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몸을 일으켜, 객실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맞은 편에 있는 화장대였다.
이상하게도, 화장대의 거울은 크게 금이 가 있어,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화장대 위에는, 수첩 하나와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나는 수첩 위에 적힌 문구를 읽어보았다.
'방명록'.
나는 수첩을 잠시 놓아두고, 객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방 끝에는 객실의 출입문으로 추정되는 문이 있었다.
나는 그 문에 가까이 다가가 문고리를 돌려 잡아당겨 보았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잠금을 풀 방법도, 잠금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밖에서 안을 잠근 문처럼 보였다.
일반적인 객실이라면, 잠겨 있어도 안에서 문고리를 잡아 당기면 열릴 터인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객실 안에 이 문을 제외한 다른 문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확실히 갇혔다.
아마도, 누군가가 나를 이곳에 가뒀다.
왜지?
누가 나를 이곳에 가뒀지?
원한을 산 사람이 있나?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객실 문을 두고, 다시 방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객실 문 옆에는 신발장과 옷장이 있었고, 옷장 안에는 수건과 샤워 가운이 두 벌 들어 있었다.
옷장 옆에는 욕조가 있는 화장실.
화장실에는 큰 욕조가 하나 있었고, 겉보기에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호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작은 창문 하나 달려 있지 않았다.
천장에 환풍구로 보이는 배기구가 있을 뿐이었다.
화장실 벽과 침대 사이에는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마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용도일 것이다.
객실 문 맞은편, 침대 바로 옆의 벽에는 벽 전체를 덮는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혹시 창문이 있을까 싶어, 커튼을 걷어 보았지만, 누리끼리한 객실 벽지만 보일 뿐이었다.
전반적으로 방을 전부 둘러본 뒤, 나는 잠시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은 분명 평범한 호텔 객실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확실하게 이상한 점이 보인다.
큰 평수의 방은 아니지만, 창문이 전혀 없다.
또, 화장대 거울에는 금이 가 있고,
유일한 출구로 보이는 두꺼운 객실 문은 잠금장치도 보이지 않으나, 단단히 잠겨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가두려고 했다면, 굳이 이런 방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상하고, 불쾌하다.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된 방에 있어서 그런가,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게 머리를 굴리던 도중에,
다시금, 그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팔을 뻗어, 수첩을 집어 들었다.
'방명록'.
나는 괜히 첫 장을 넘겨 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을 것이란 내 예상과 다르게, 수첩 안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적힌 내용을 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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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신정욱
1일.
나는 갇혔다.
이곳에 온 지, 벌써 3시간은 넘은 것 같다. 방 안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수첩이라도 끄적여 본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2일.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났다. 내가 자고 일어났으니까. 오늘을 이틀째로 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밀폐되어서 밖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도 숨 쉬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점이 또 있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다. 체감상 15시간은 넘게 지난 것 같은데, 배고픔이 전혀 없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분명히 뭐가 이상하다.
3일.
잠은 분명히 잘 수 있는 것을 또 확인했다.
하지만, 얼마 동안 잤는지 확인할 수가 없자.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
이젠 시간 감각이 이상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40시간 이상은 지난 것 같은데...
방 안은 달라진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4일.
정신이 점점 이상해지는 느낌이 든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다.
난 왜 이곳에 갇힌 걸까?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누가 날 가뒀더라도, 이렇게 방치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인기척이라도 내줬으면 좋겠다.
제발.
6일.
씨발, 사람을 가둬 놨으면 뭐라도 좀 해.
누가 날 가뒀는지 알 것 같다.
성수야, 이 씨발새끼야. 너지?
돈 안 갚았다고 이러는 거지?
내가 이번 달 안에 갚는다고 했는데, 응? 성수야.
미안해, 성수야. 바로 갚을게.
그러니까 제발 이 좆같은 방에서 좀 꺼내줘.
통장번호랑 다 불 테니까 제발 목소리라도 들려줘.
성수야.
8일.
왜 자도 자도 피곤할까.
10일.
거울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게 보인다.
내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것일 뿐인데.
내 모습. 내가.
내 모습이 비쳐 보인다고?
거울 안에 보이는 건 누구지?
거울 속에,
누가 있어?
12일.
거울 속을 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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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귀를 마지막으로, 기록이 끊어진 듯하다.
신정욱.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일단,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다.
아마, 이 사람은 나보다 먼저 이곳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글씨가 날리거나, 페이지가 찢어져 제대로 볼 수 없는 내용을 제하고 읽었음에도,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거나, 요의나 변의조차 느끼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거울 속을 보지 말라는 것.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거울이 깨져 있어서 보고 싶어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 사람이 객실에 있었을 때는 거울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요한 방 안에서 이상한 위화감이 전신에 느껴졌다.
아직 수첩 뒤에 내용이 남은 것 같다.
나는 이어서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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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정아
뭐라도 적어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 이 방에 갇힌 뒤, 이 수첩의 내용을 읽어 보았어요.
순간 너무 무서워서, 수첩을 집어 던졌고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것 같아요.
모든 것이 단절되어서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뭐라도 적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지 않으면, 누구도 찾아줄 것 같지 않아요.
날짜를 기록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하루를 정확하게 가늠할 방법은 없어요.
피곤하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아요.
모든 욕구가 느껴지지 않아요.
저는 살아 있는 걸까요?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이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해야겠어요.
혹시나, 누군가 나중에 이 수첩을 본다면,..
제 남자 친구에게 소식을 전해주세요.
자기야, 보고 싶어.. 자기야.
.
아무것도 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너무 조용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수첩 내용을 확인하면, 실마리가 더 잡히지 않을까?
신정욱.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남은 내용을 더 읽어봐야 할 것 같아.
.
정욱 씨. 많이 힘들었겠어요.
정욱 씨. 많이 외로웠겠어요.
정욱 씨.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정욱 씨.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거울 속에서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해줬나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정욱 씨.
제발 알려주세요.
정욱 씨. 저 어떻게 해요?
저 몇 시간 전부터 배고프기 시작했어요.
정욱 씨는 배고프지 않았어요?
정욱 씨. 지금 이 방에 있어요?
어디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
배고파.
너무 배고파.
배가 너무 고파.
미칠 것 같아.
.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
누가 부르고 있어.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네. 커튼 뒤에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이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언젠가 꼭 사례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미안해요, 미안해요.
못 참겠어요.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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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아마 여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기록은, 마지막 글귀를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알아볼 수 없었다.
중간부터 숨이 살짝 가빠지고, 손이 떨렸다.
그들은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지 모하고 모두 미쳐버린 건가?
아직, 수첩 뒤에 내용이 더 남아 있다.
아마 남은 분량을 생각한다면,
마지막 내용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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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기록을 원래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게 나중에 올 사람들한테도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하겠음.
방명록 내용을 전부 다 읽어봤음.
솔직히 말해서, 도움 되는 내용 별로 없음.
대부분 다 미쳐버리거나,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음.
그래도 이 방명록이 기념비적으로 제일 첫 번째인 듯하니까, 놈들도 계속 두는 거겠지.
내가 적고 있는 이 내용은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아마 다 볼 수 있을 듯?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맞을 거임. 나는 방명록 내용을 다 읽어보고,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음.
우선, 놈들도 방명록 내용은 웬만해서는 안 건들임.
그게 재밌나? 어쨌든,
중간에 찢어지거나 분실되거나 한 것들은, 아마 중간중간 트롤하는 새끼들 때문인 듯.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다 죽으라고? 그 새끼들은 벌써 답이 없는 거.
만약 나 다음에도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화장실 환풍구부터 열어보셈.
거기 다 모아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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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삐뚤한 글씨체와 어른스럽지 않은 문체.
하지만, 나는 이름도 남기지 않은 이 사람이 앞의 두 사람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가보았다.
아까 보았던 천장의 환풍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욕조를 밟고 올라가 환풍구 이음새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 보았다.
다행히, 틈 사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환풍구를 열어 젖힌 순간.
하얀색 보자기 같은 물체가 환풍구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
난 손으로 그 천을 잡아당겼다.
천이 환풍구 밖으로 빠져나오자, 하얀 천으로 싸진 커다란 물체가 욕조 위로 떨어졌다.
욕조와 부딪치며 큰 소리를 낸 뒤, 물건을 감싸고 있던 천이 풀어지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수첩들.
쏟아진 수첩들이 거의 욕조를 반쯤 가득 채웠다.
난 욕조에서 내려와, 수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방명록'.
설마. 이게 전부 다?
난 욕조에서 집어 든 수첩을 아무렇게나 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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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방 안에는 항상 두 명이 있어.
그러니까 외롭지 않아.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줄 알아?
근데 난 왜 친구가 될 수 없어?
왜?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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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순간 알 수 없는 역겨움을 느끼고, 빠르게 보던 내용을 건너뛰었다.
나는 계속해서 수첩을 넘겼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글자들은 글인지 그림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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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쌀 곳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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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까지마. 씨발새끼야. 꺼져. 제발. 씨발련아. 꺼져. 안 봐. 절대로 안 봐. 꺼져. 내가 모를 줄 알고? 씨발새끼야. 하루종일 거이 있어 봐. 내가 볼 줄 알아? 좆까. 좋은 생각이 났어. 눈만 없으면 니가 하루종일 거기 있어도 어차피 못 봐. 내가 이겼지? 씨발련아. 니가 어쩔건데? 하루종일 거기 서 있어도 눈만 없으면 못 보는데? 안 가? 안 가? 간다? 나 간다? 진짜? 간다. 간다. 간다. 간다. 간다. 씨발. 간다. 이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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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사람 몸은 유연하네요.
잘 구겨집니다.
작은 틈새에도 잘 들어가요.
근데 글 쓰기는 좀 힘드네요.
조금 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늑하네요.
여기 참 좋아요.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데.
양쪽 다리랑 하체는 감각이 없네요. 한쪽 팔은 간신히 움직입니다.
목만 더 돌리면 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호흡에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볼게요.
아직은 조금 불안해서.
네.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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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몇 번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만 수첩을 덮어버렸다.
수첩을 볼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정말 사람이 쓴 거라고?
난 욕조에,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던져버렸다.
난 화장실 밖으로 나가, 다시 이름 없는 사람이 적은 내용을 이어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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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풍구 확인해 보고 싶으면 확인해보셈.
사실 다 읽는 것은 추천 안 함.
보니까, 그거 읽다가 미친 사람도 있는 듯.
나는 전부 다 읽었음. 원래 공감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가, 읽어도 별생각 없음.
놀랍게도, 저 많은 수첩 중 도움 되는 내용은 10%도 안 됨.
그래도 읽으면서 몇 가지 내용을 종합해 보니, 몇 가지는 확실한 것 같음.
우선,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밖의 정보를 알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게 존나 신기한데, 아무런 욕구도 느껴지지 않음.
피곤하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음. 갈증이 느껴진다거나 똥싸고 싶다거나 오줌싸고 싶다거나, 그런 것도 전혀 없음.
방명록 보다 보면 별 지랄 해놓는 애들 다 있는데, 그거 다 미쳐서 그런 거임.
내가 꽤 오래 있었던 편인 것 같은데, 전혀 그런 거 없음.
그리고, 느낌상 1주나 2주 넘어가는 정도에, '거울'을 언급하며 미쳐버리는 경우가 아주 많음.
병신들, 왜 거울 보고 있음? 깨버리면 되는걸.
3주는 넘은 것 같은데, 아무 일 없음.
정신은 비교적 멀쩡하게 있을 수 있음.
안타깝게도, 저 많은 방명록 중에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거나 하는 실마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음.
아마 여기서 나갔다면, 굳이 방명록에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놈들이 지워놨을 수도 있고.
그리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딱히 별일이 생기진 않는 것 같음.
더 좆같지. 내가 미칠 때까지 이 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
그 수첩 중에 내가 끄트머리만 조금씩 접어 놓은 수첩들이 있는데, 한 10권 정도 있나.
그거 한 스님이 계속 쓰시던 거. 대단한 사람임. 아마 제일 오래 있었는 듯.
그건 읽어도 괜찮음. 아, 마지막 것만 빼고.
그리고 남은 한가지.
검은색 커튼 뒤에 보면 누리끼리한 벽지가 있을 텐데.
그중에, 손으로 두들겨서 소리가 나는 곳이 있음.
거기 아주 높은 확률로 내가 오기 전에 온 사람이 들어 있음.
난 안 봤음. 이미 뒈진 사람 봐서 뭐 함?
이제 방명록도 다 읽었고, 남길만한 것도 대충 다 적은 듯.
그런데, 나는 여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함.
처음에는 그냥 무조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음.
솔직히 말해서, 원래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크게 없고.
그냥 적응해서 살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혼자서 잘 지내면, 놈들도 지루해서 한 번쯤은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음.
나 다음 들어오는 사람도 마음을 편하게 가지셈.
보니까, 나가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미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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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이 적은 방명록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방명록을 살며시 덮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욕조에 쌓인 수많은 수첩들.
분명 나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이 방을 거쳐 갔다.
그리고, 빠져나갔는지 어떻게 됐는지 알 수는 없다.
이 사람.
이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혹시 이 방을 나가지는 않았을까?
나갔다면, 어떻게?
아니면, 결국은 나가지 못했나?
그럼 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이 많은 사람을 모두 어떻게 처리한 거지?
그때, 나는 방명록에 적힌 글귀가 떠올랐다.
'그리고 남은 한가지, 검은색 커튼 뒤에 보면 누리끼리한 벽지가 있을 텐데.
그중에, 손으로 두들겨서 소리가 나는 곳이 있음.
거기 아주 높은 확률로 내가 오기 전에 온 사람이 들어 있음.'
벽지 너머에, 다른 공간이 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는 높은 확률로 내가 오기 전 이곳에 왔던 사람이 있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만약 내가 오기 전에 왔던 사람이 탈출했다면, 벽지 뒤에는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혹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색 커튼이 처진 벽 쪽으로 향했다.
바로 커튼을 모두 치웠다.
아까 봤던 누리끼리한 벽지. 나는 벽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꽉 막힌 콘크리트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허리쯤 높이에서 소리의 느낌이 달라진다.
찾았다.
벽지 뒤 공간이 비어 있다.
나는 화장대에서 만년필을 가져와 벽지에 찔러 넣었다.
푹 들어가는 만년필을 직선으로 잡아당겨 벽지에 틈을 만들었다.
찢어진 틈에 손을 집어넣고, 벽지를 위아래로 벌려 찢었다.
찢어진 벽지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발.
운동화를 신은 사람의 발이었다.
난 그 앞에서 가빠진 숨을 진정시켰다.
벽지 속 공간은 사람 한 명이 누워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일 뿐이었다.
난 고민 끝에 결국 발목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손을 잡아당겨 밖으로 이끌어 보니, 창백하게 식은 시신 한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어린, 중학생 정도의 남자아이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는 작은 수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난 인상을 쓰며, 그의 손에서 수첩을 가져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수첩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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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임.
사실 나도 나가고 싶음.
이제 스님보다 오래 있었던 것 같음.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이제 한계인 거 같고.
사실 내가 걸렸던 건, 배뇨였음.
욕구가 시작된 이후부터 거의 석 달 정도를 참음.
누굴 말려 죽이려고.
이제 안될 거 같음.
혹시나 이걸 보는 사람 있으면, 거짓말해서 미안함.
그래도 운이 좋으면, 더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보고 싶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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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내용은 이게 마지막인듯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조금의 희망을 품고 끝까지 나갈 방법을 찾았던 것일까?
난 수첩을 내려놓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니,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방 안은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고요하고, 고요하고, 또 고요할 뿐이다.
차라리 저 욕조 속에 있는 수첩을 모두 읽어버리고, 빠르게 미쳐버리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다면, 저 아이처럼 미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아니, 운이 안 좋은 건가.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이 방에 몇 번째로 들어 온 사람이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일까?
가장 첫 번째로 들어온 사람일까?
아니면, 모든 방명록의 내용을 알아버린 저 아이?
그렇다면, 나는?
거울을 볼 선택지조차 없는 나는, 운이 없다고 해야 하는 건가?
가장 빠르게 미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지?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이 방에 갇혔던 사람들은 '모두'. 이 방을 빠져나갔다.
모든 방명록이 한 가지 선택지만을 제시한다.
목표가 확실해지니, 오히려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나는 어떻게 될까?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