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주의(신언어학)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의 언어학은 포르투나프(F.F.Fortunatov)의 모스크바 학파와 보두엥 드 쿠르트네(Baudouin de Courtenay)의 페테르부르크 학파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혁명 이후로도 이 두 학파는 학문적 성과를 내면서 20년대 초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언어학은 소련 학술 활동에 대한 재편이 이뤄지면서 쇠퇴하였다. 혁명 이후 사회과학의 강조로 인해 대학에서 사회과학의 비중은 늘어난 데 비해, 인문학은 축소되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특히 소비에트 정부는 기존의 언어학을 ‘부르주아적’이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적용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에 대학의 언어학부는 폐지되어 인근 학부에 편입되었고, 인종학과의 한 과목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마르주의의 제창자 니콜라이 마르그의 이론은 1940년대까지 소련 언어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히려 영향력을 키웠던 언어학이 있었다. 바로 마르(N. Ja. Marr)가 제창한 야펫 이론이었다. 1899년에 마르에 의해 등장해 1921년 야펫어 연구소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나, 주류 언어학으로부터 주목받지는 못했다.
야펫 이론은 지중해 지역에 거주했던 ‘야펫 부족’을 기원으로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과 교류하면서 언어의 교차가 일어나 확산했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론을 다듬으면서 야펫어가 모든 언어의 시원어(始原語)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923년 11월 21일, 과학 아카데미에서 마르의 짧은 발표는 야펫 이론에서 발전한 신언어학이 등장하는 계기인 동시에 소련의 주류 언어학을 단숨에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신언어학의 내용은 크게 단계적 발전론, 4원소설, 상부구조설, 야펫 이론의 4가지로 구성되었다. 앞서 설명한 야펫 이론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주장은 다음과 같다. 단계적 발전론은 언어가 하나의 경로만으로 발전하며, 사회가 발전할 때 언어도 같이 발전한다는 주장이었다. 4원소설은 인류의 언어가 음성 언어로 발전할 때, sal, ber, jon, ros의 4가지 음절에서 발전했다는 주장이었다. 상부구조설은 언어도 문화와 같이 상부구조를 차지하기에 언어는 계급적인 성격을 지니며, 같은 계급적 성격을 지닌 언어는 유사성을 지닌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신언어학, 즉 마르주의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언어학이라기엔 너무 비과학적이었다. 마르가 주장한 이론은 주류 언어학에서 벗어난 연구 방법이었다. 심지어 마르의 주 분야인 캅카스제어 연구에서 별다른 추가 연구 없이 전 세계 언어로 확장 적용한 게 바로 신언어학이었다. 마르의 연구는 언어학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신언어학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대학생과 공산당이었다. 혁명 직후 혁신적인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대학생들은 주류 언어학에서 벗어난 이 이론에 열광했다. 공산당은 ‘언어학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며 ‘부르주아적’ 언어학과 대비되는 마르의 이론에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교육위원인 루나차르스키(A. Lunacarskij)가 마르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해준 것을 시작으로 마르주의가 언어학계의 주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르의 이론에 적대적인 침묵을 지키던 기존 언어학계는 1927년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러시아 사회과학 학술 연구소 연합(RANION)의 어문학부 책임자 폴리바노프(Y. Polivanov)가 1927년부터 1929년에 걸쳐 마르주의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1928년에 기고된 포크롭스키(M. Pokrovsky)의 글처럼 마르주의와 역사적 유물론과의 합치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1930년에는 젊은 언어학자들이 언어 전선(Jazikofront)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마르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격은 실패로 끝났다. 이미 학계 주류를 차지한 마르주의자들은 언어학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와 당의 권위를 바탕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폴리바노프는 논쟁 이후 학계에서 퇴출되었고, 1930년대에는 숙청되었다. ‘언어 전선’의 활동은 당의 개입으로 인해 1932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마르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면서 1933년부터는 ‘슬라브학자들 사건’을 일으켜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언어학자들을 제거하였다.
마르가 1935년에 사망한 뒤에도, 신언어학의 위세는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50년에 들어서며 마르주의는 한순간에 몰락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치코바바(A. Chikobava)의 비판으로 다시 시작된 마르주의 논쟁은 1950년 6월 20일에 스탈린이 작성한 <언어학에서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해서>라는 논평으로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스탈린은 논평에서 언어는 상부구조를 가지지 않으며, 언어는 서로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마르의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상관없는 저급한 내용을 가지고 혁명 이전 언어학을 부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면서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스탈린의 논평 이후, 기존 언어학계는 다시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마르주의는 소수의 학자가 옹호하며 명맥을 유지했으나, 연구에서 성과를 보이진 못하다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3줄 요약
1. 러시아 언어학계에 니콜라이 마르가 혜성처럼 등장, 마르주의를 탄생시킴
2. 공산당과 대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문제는 비과학적이었기에 비판을 받음
3. 마르주의자들은 반대자들을 담궜지만, 1950년 스탈린의 비판으로 한순간에 사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