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작품도 어쩌다보니 하드론님 작품으로 가져오게됫네요
군대소설로는 원탑이 아닐까합니다
기억에남는 작품들이있으시면 쪽지보내주시면 바로찾아서 올리겠슴다 즐감하시고 좋은밤되세요
시작
"김병장님, 짬밥 버리는 곳에 고양이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재촉에도 점심을 준비하던 김병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무쇠 가마 속에 섞여있는 야채와 돼지고기를 열심히 휘젓고
있었다.
사회에 있을 때 요리와 관련없는 무슨 전문대를 다니다 왔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취사병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런데 확실한 건 그가 요리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 거칠고 우람한 손으로 몇 가지 되지도 않는 재료로 만들어낸 요리는 항상 부대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또한 칼질까지 예술이다.
태어나서 과도로 사과 껍질을 5초 만에 매끈하게 벗겨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왼손으로 사과의 위아래 오목한 곳을 잡고 조금씩 돌리며, 오른손으로 과도를 사과 표면에 가져간 후 요동치는 지진계의 바늘처럼
과도를 사정없이 좌우로 왕복운동시키더니 사과 모양을 잃지 않고 그대로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다.
실로 마술에 가까웠다.
근육질 몸에 덩치는 산처럼 우람하여 겉보기에 매우 거칠 것으로 보이지만 성격은 생각보다 내성적이다.
그러나 한번 성질을 냈다하면 부대 전체가 뒤집어질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상병 때 고참을 패서 군기교육대에 갔다온 적도 있다.
김병장은 순간적인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본 것 중 하나는 식판 정리를 하던 후임병이 말길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도마질을 하고 있던 칼을 집어 던져버린 적도 있다.
그 무시무시한 정육점에서나 쓰는 무쇠칼이 연신 회전을 거듭하며 후임병 옆을 스쳐 취사장 벽에 박혀버렸다.
망나니 김병장.....
그 뒤로 후임병들 사이에서 그는 그렇게 통한다.
그가 앞치마를 두르고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할 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무슨 명령을 내릴까 조마조마하여 지켜보게 되고,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몸 속에 금속성분이 들어오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눈에 띄게 불었음을 보고한 나는 김병장의 대답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막 일병을 단 내가 그에게 대답을 독촉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도 머리 짧은 망나니한테...
"얼마나 많은데?"
"방금 보고 온 것만 해도 대여섯마리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김병장은 삽자루 같은 주걱질을 멈추었다.
"신발...어디 고양이 분양소라도 있는거야? 왜 이렇게 자꾸 늘어나는거야?"
"어떡합니까? 김병장님."
"어떡하긴 어떡해? 약을 놓든 덫을 놓든 해야지.
아...신발 바빠 죽겠는데 별게 다 신경 쓰이게 만드네."
김병장은 나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명령했다.
"너, 이것 좀 젓고 있어. 나가서 확인 좀 해보게."
김병장은 나에게 삽자루같은 커다란 주걱을 넘겨주고 취사장을 나섰다.
나는 심기가 불편했다.
고양이들 입장에서 김병장은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잔밥통에 서성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김병장에게 죽어간 고양이가 네다섯마리나 된다.
그것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다.
한 번은 고양이를 목 매달아 밤새 두들겨 패서 죽인 적도 있고, 한 번은 끔찍하게 목을 잘라버린 적도 있다.
그 중에 가장 끔찍했던 것은 덫에 걸려 바동거리는 고양이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때다.
그 역겨운 냄새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양이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같이 늘어가는 듯 보였다.
나는 그가 넘겨준 주걱을 받아들고 거대한 가마솥에서 익어가는 재료들을 열심히 휘저었다.
몇 번을 젓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힘이 장사인지 깨달았다.
마치 거의 굳어가는 콘크리트 반죽을 삽으로 휘젓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올라오는 열기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나는 취사병이 아니다.
우리 부대 취사병은 공식적으로 김병장 하나 뿐이고, 나머지는 소대별로 돌아가며 일주일동안 그의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일 뿐이다.
이번 주는 내가 김병장과 함께 해야 한다.
모든 요리는 김병장이 하며, 그외 설겆이 같은 소소한 치다꺼리만 내가 하게 된다.
점점 배식 시간이 다가오는데 김병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괜히 불안했다.
고양이를 잡아 죽이고 내장이라도 꺼내 취사장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두려움 반, 걱정 반...
나는 가스불을 끄고 취사장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예상과 달리 물끄러미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를 빨고 있는 김병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앞에는 잔밥통 주변을 서성이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고양이 수가 벌써 열마리를 넘어선 것 같았다.
마치 동족을 죽인 것에 대한 분노로 항의 시위라도 온 것 같았다.
나는 소리없이 잔밥통 주변을 서성이는 고양이가 거슬렸다.
솔직히 그들의 행동이 거슬리는게 아니라 김병장에게 잡힐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무슨 또 험한 광경을 목격할지 몰라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김병장은 고양이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의 초점은 나와 같은 곳에 모아진게 아니었다.
그가 시선을 두고 있는 방향은 그 뒤편의 어둑어둑한 숲이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자 나는 김병장을 재촉했다.
"김병장님, 배식시간 다가옵니다."
나의 말에도 김병장은 한발자국도 꿈쩍하지 않았다.
시선을 숲에 고정한 채 잠시 후 김병장은 입을 열었다.
"야..이창훈..."
"일병, 이창훈.."
"너...저 숲에 가본 적 있냐?"
"없습니다."
갑자기 그가 왜 이런 것을 묻는걸까?
김병장은 잠시 담배연기의 흡입을 멈추었다.
바람 때문인지 연기를 빨지 않았음에도 담배는 빠른 속도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불씨가 필터까지 접근했음에도 김병장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김병장은 그 곳을 향한 시선을 풀지 않았다.
기묘한 기운을 온 몸을 감싸고 돌았다.
특히 눈에 띄게 그 수가 불어난 고양이가 찝찝한 기분을 더욱 돋우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김병장을 일깨웠다.
"김병장님, 배식시간 다가옵니다."
그러나 나의 재촉에 김병장은 엉뚱한 대답으로 응수했다.
"이 고양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온게 아냐."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망쳐 온거야. 뭔가를 피해서..."
내가 김병장의 정체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김병장은 숲을 향한 시선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고기 다 볶았으면 퍼내서 배식판에 올려 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취사장으로 향했다.
고기가 다 익었음을 확인한 나는 엄청난 양의 제육볶음을 배식판에 퍼내기 시작했다.
한 참을 퍼 내고 있던 그 때 나의 눈에 들어온 뭔가가 보였다.
150여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국을 끓일 수 있는 가스버너가 달린 커다란 조리기였다.
구형 오르간처럼 생긴 스테인레스 재질의 조리기이다.
뚜껑을 열면 안에 빈 공간이 있고 그 곳에 여러 재료를 넣는다.
그리고 뒷편에 설치된 가스버너를 켜서 가열하면 국이 되는 것이다.
보통 국이 다 끓여지면 열기를 식히기 위해 뚜껑을 열여놓는데, 뚜껑 위 선반에 놓여진 검은색 수건가 눈에 들어왔다.
버너 주변의 이물질을 닦는 수건인데 본래의 색깔은 검은 색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리기 위의 선반도 조리기처럼 스테인레스 재질이라 미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불길한 예감은 적중해 버리고 말았다.
꿈틀거리듯 미끄럼을 타던 그 수건가 국통안으로 몸을 던져버린 것이다.
"헉!!!"
나는 단말마 같은 숨죽은 비명을 지르고는 내 머리통보다 큰 국자를 들고 국통으로 달려갔다.
그 거대한 국통속에 담긴 것은 '배추우거지 된장국'이었다.
군대에서는 된장국을 간단히 '똥국'이라고 한다.
나는 국자를 이리저리 저어 들어올리며 똥국속에서 수건를 찾으려 애썼다.
"뭐하냐?"
"예?"
김병장이 들어왔다.
"배식 준비해야지."
나는 놀란 가슴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 부대는 밥이나 반찬은 본인이 식판에 담을 수 있고 국만 취사병이 배식한다.
밥과 기타 반찬들이 배식대 위에 놓여졌다.
멀리서 부대원들의 군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며 국통 앞을 서성이는 나를 바라본 김병장이 입을 열었다.
"뭐해 임마? 국 배식 준비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김병장은 하루의 일과가 끝난 사람처럼 내 뒤에 멀찌감치 의자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 앉아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나는 커다란 국자를 이용해 조리기에 담긴 국을 작은 국통에 조심스럽게 퍼 담았다.
물론 건더기는 퍼올릴 수가 없었다.
만일 그 시커먼 수건가 나오면 내 뒤통수에 그 무쇠칼이 내리꽂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배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국통 속의 국을 작은 국자를 이용해 병사들에게 한국자씩 배식을 했다.
수건 국물이 섞여있다고 생각하니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내가 살아야 했다.
몇 분이 지나자 작은 국통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또다시 큰 국자를 이용해 조리기에서 국을 퍼냈다.
물론 국물만이다.
그리고 다시 배식.....
이렇게 반복하기를 서너번.....
그런데 갑자기 말년 병장 한 명이 배식판을 통해 머리를 내밀었다.
일명 미친 개로 통하는 김병장 킬러 최병장이었다.
마르고 시커먼 얼굴에 눈 밑에 칼을 맞은 건지 긁힌 건지 모르는 3센티미터 정도의 흉터 자국이 있는데,
그것 하나로도 최병장의 모든 이미지를 다 표현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무섭게 생겼다.
최병장은 김병장보다 4개월 선임인데 김병장을 왜 싫어하는지 이유는 잘 모른다.
그런데 항상 최병장은 김병장을 괴롭혀왔다.
만일 우리 부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이들 둘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하나씩 나눠 차지할 것이다.
최병장이 나에게 김병장을 찾았다.
"야...김창식이 어딨어?"
"왜... 왜 그러십니까?"
"닥치고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미친개와 망나니 사이에서 나는 별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단지 외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으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 뿐이었다.
불려온 김병장은 최병장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오늘 국 메뉴 뭐야?"
"똥국입니다."
"그런데 왜 똥국에 건더기가 없어?"
"예? 우거지랑 여러가지 많이 넣었습니다."
"야..신발 니 눈으로 봐! 뭐가 있나?"
최병장은 옆에 놓여있던 식판을 들이 밀었다.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국물.....
말없이 국을 바라보던 김병장이 나를 돌아봤다.
무서웠다. 그 눈빛...
취사장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될 듯한 기분이었다.
나무토막처럼 나는 얼어붙었다.
"너...시발...어떻게 배식한거야?"
"그게...저.."
"꺼져, 배식은 내가 한다."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꺼져 시발아."
그는 조리기로 다가가더니 팔을 걷어 올렸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저 새끼 이 곳에 집어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말거다."
그러더니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 들려진 커다란 국자가 연신 조리기 속의 우거지를 퍼내기 시작했다.
그 우거지가 들어 올려질 때마다 나는 심장의 기능이 하나씩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배식.....
작은 국통이 바닥을 보일 때마다 김병장은 나에게 보란 듯이 조리기에서 국통으로 건더기를 퍼올렸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차례...
드디어 조리기 속을 휘젓던 국자를 따라 길고 시커먼 무언가가 따라 올라왔다.
그 수건였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김병장도 어이가 없는지 부릅 뜬 눈으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바빴다.
몇 초가 지났을까?
김병장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보왔다.
김병장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넌 못 본거다."
그러더니 국자에 걸려나온 그 시커먼 수건를 조리기 안으로 깊이 쑤셔넣었다.
'이 새끼...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나는 행여나 머릿속의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계속-
자정이 넘어서자 5초소 주변으로 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원래 취사병 도우미는 근무를 열외시켜 주는데, 부대원 몇이 훈련 파견 나가는 바람에 인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달빛이 조명 역할을 해줬었는데 그마저도 이 깊은 산중에서는 오래가지 못하고 능선 뒷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나의 뒤에서 초소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전상병은 손톱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상병 말호봉인 전상병은 부대내에서 군기 담당병으로 불렸다.
나는 늘 생각하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 부대 고참들은 하나같이 다 무섭게 생겼다는 것이다.
전상병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전상병은 어디서 썬텐을 하는지 얼굴은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고, 까맣게 그을린 울퉁불퉁한 감자덩어리에 두 개의 칼집을
낸 것처럼 찢어진 눈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눈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두툼란 눈꺼풀이 눈알을 덮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먹어치울듯한 큰 입과 그것에 균형을 맞추기라도 하듯 두툼한 입술이 막대풍선처럼 포개져 있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상당한 학구파였고, 명문대를 다니다 온 사람이었다.
쥐죽은 듯한 적막 속에서 사각거리는 손톱 갈리는 소리만이 지금 들려오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야..이창훈"
"일병, 이창훈"
"심심하냐?"
"아닙니다."
"주변 분위기도 그럴싸한데 내가 무서운 얘기 하나 해줄까?"
"무슨 얘기 말입니까?"
"이 5초소가 왜 있는지 아냐?"
"....모르겠습니다."
"흐흐흐..."
갑자기 전상병은 내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뱉았다.
지금 내 뒤에 있서 볼 수 없지만 그는 분명 그 두터운 막대풍선 사이로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5초소는 조금 이상했다.
특별히 경계를 해야될 시설물도 없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도 아니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부대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족히 눈짐작으로 보아도 부대막사로부터 이백여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다.
도대체 이런 고립된 산중에 누가 초소를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내가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후에 일어난 일이야.
부대에 정한수라는 이등병이 전입왔어.
운전병 후반기 교육을 받고 온 놈인데, 이런럴... 자대 배치 다음 달에 일병을 달더라구.
내가 자대 생활을 두 달이나 먼저 하고 있었는데 쫄병이라고 온 놈이 내 고참이었던거야.
기분 더러웠지.
그 자식은 체격도 왜소하고 삐쩍 말라서 힘도 없는데다가 약간 모자른 놈이였어.
아침에 구보하면 항상 뒤쳐지기 일쑤였고, 행군할 때도 항상 낙오됐었지.
나중엔 아예 그놈만 군장을 메지 않고 행군을 할 때도 있었다니까.
아니면 선탑 차량 운전을 했지.
일하는 것도 지랄맞도록 느려 터졌고, 항상 쉬운 일만 맡아서 했었지.
그 놈 때문에 우리 동기들이 무지하게 고생했었지.
그 놈이 할 일을 우리가 대신 했었으니까
게다가 말도 어눌해서 졸라 불쌍해 보였고, 우리에게 고참 대접도 받기 힘들었지.
혹시나 사고라도 나서 죽을까봐 대대장은 그 놈을 특별 관리 대상으로 삼았지."
"특별 관리 대상이 뭡니까?"
"별거 아냐. 군대 부적응자가 혹시나 자살이라도 할까봐 감시병을 붙여두는거지.
감시병이 고참이면 생활이 힘들 것 같으니까 보통은 같은 동기를 감시병으로 붙여두지.
그 놈이 어딜가든 쫓아다니는거야. 심지어 화장실 가서도 감시병이 밖에서 1분 간격으로 노크를 하지.
보통 화장실에서 자살을 많이 하니까 살아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는거야.
그 자식 실제로 손목에 칼로 그은 듯한 흉터가 몇 개 있더라구."
전상병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잠시 손톱 손질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 놈 진짜 이상했어. 소름끼치도록 말야..."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내 뒤에서 진지한 말투를 내뱉고 있는 전상병이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차라리 계속 손톱 손질하는 소리를 내주길 바랬다.
"그 자식은 이상한 부적같은 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더라구.
어떤 건 모자 속에 어떤 건 군화 속에 어떤 건 군장 속에......
알고보니까 걔 엄마가 무당이라고 그러더라구.
몸이 약한 아들이 군대에 있으니까 엄마가 정성들여 부적을 써줬나봐.
그런데 그건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부적이 아니었어.
종이도 붉은 색인데다가 문양도 글자가 아니고 무서운 괴물형상같은 그림이 깨알같이 그려져 있었지.
아무도 그 부적의 용도에 대해 묻지 않았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빴어.
게다가 특별 관리 대상이라 아무도 걔한테 가까이 가려하지 않았지.
걔한테는 영기(靈氣)가 느껴졌어. 그 썩어가는 몸뚱아리에 쓸 만한 거라곤 눈이었어.
눈에서 무서울 정도로 광채가 돌았지.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 두 눈....
그러던 어느날이었어.
여기 5초소 자리는 원래 뒤산의 능선 줄기가 끝나는 곳이었지.
토질이 마사토라서 부대에서 이곳을 파내어 연병장이나 비포장 도로에 깔기로 했지.
단순히 삽질로 능선 줄기 하나를 파낸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했어.
그래서 대대장이 공병대에 요청을 해서 포크레인이 한대 왔지.
능선 줄기만 파내어 주면 나머지는 우리가 삽질을 하면 됐으니까 일거리가 무지하게 많이 줄게 된거지.
그런데 그때 정한수 일병이 같이 있었는데 포크레인이 몇 번 굴삭질을 하는 걸 보더니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거야."
나는 마른 침을 한번 삼키며 조용히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 봤다.
12시 35분.....
전상병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공포스런 기운이 주변을 감싸는 듯 했다.
내 기분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전장병은 여전히 내 뒷편에 앉아 말을 이었다.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파내어진 자리를 지켜보고 있는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마구 괴성을 지르며 포크레인 운전병한테 멈추라고 소리를 지르는거야.
그리고는 그 허약한 몸으로 미친듯이 삽질을 하며 다시 흙을 구덩이에 처넣는거야.
미친 놈 같았어. 아니...그냥 미쳤었어.
순간 우리는 혼이 빠진 것처럼 몇 초동안 멍하니 걔 행동만을 지켜보고만 있었지.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형상가 범죄자를 체포하듯이 팔을 뒤로 잡아챈 다음 바닥에 눕혀 그를 제압했지."
"왜....왜 그랬답니까?"
나는 이미 전상병의 분위기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물음에 전상병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듯 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나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신발...구덩이에서 귀신이 나온데...그것도 그냥 나오는게 아니라 쏟아져 나오고 있대."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내 척추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긴숨을 한번 되새기며, 그에게 물었다.
"그..그럼... 그 구덩이 자리가 이곳입니까?"
나는 질문을 던져놓고,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전상병의 얼굴을 살폈다.
전상병은 내 옆에 바른 자세로 서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인데도 전상병은 그 때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전상병은 나의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다른 놈이 그런 얘기를 했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지도 몰라.
그런데 정한수 그 놈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다들 맥반석 위의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지."
전상병은 긴장을 풀려는지 잠시 긴 숨을 내뱉았다.
"작업은 중지됐어. 대대장이 직접 공병대에 부탁해서 포크레인까지 동원된 작업이 중단된거야.
같이 있던 소대장도 사색이 되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었어.
대대장에게 욕을 처먹는걸 각오하고 작업을 취소시키거나 아니면 정한수 말을 무시하고 계속 파내려가는 거였어.
"어..어떻게 했습니까?"
나와 나란히 같이 서있던 전상병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답을 했다.
"그냥 팠지...."
나는 마치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냥 팠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삽질을 하면서 우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예정대로 마사토를 트럭에 퍼담아 연병장에 깔았어."
"그 일병은 어떻게 됐습니까?"
"근신 조치 되었어. 외부활동은 금지되었고, 부대 내에서 하루종일 청소하고 밤에는 반성문을 썼지.
감시는 더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근무도 열외되었어.
그런데 그 뒤로 그 놈의 행동이 이상했어.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자꾸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 하는거야.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진지했어.
진짜로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하는 사람 같았다니까."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상병을 말을 멈추게 할 권한이 없었다.
지금 여기 저기서 수많은 손들이 나를 쓰다듬는 것 같은 한기가 온 몸에 퍼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부대에 회식이 있던 날이었지.
돼지를 한 마리 잡았는데 보통 맛있는 부위는 대대장이나 중대장에게 건네지고 나머지를 부대원들이 먹게 되지.
보통 썰어서 구워먹거나 제육볶음으로 해먹는데 그 때 취사병이 제안을 하나 하는거야.
통째로 쇠봉을 박아서 바베큐로 구워먹자는거야.
부대원들은 우린 흔쾌히 승락했지.
그 때 고참들이 졸병들에게 불을 땔 장작거리를 주워오라는거야.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이 저녁 7시가 넘을 무렵 어둑어둑한 산속으로 나무쪼가리를 주으러 갔지.
산에 들어서기 전에는 별로 어둡지 않았는데 산속으로 들어가니까 제법 많이 어두워지더라구.
그런데...후..."
전상병은 뭐가 두려운지 다시 한번 긴 숨을 내뱉았다.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려서 적당한 장작거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어.
그런데 날이 더 어두워질 것 같으니까 우린 눈에 띠는 대로 장작거리를 열심히 포대자루에 주워 담았어.
나무쪼가리가 많은 곳이 있길래 정신없이 한참을 주웠지.
그런데 줍다보니까 그 자리가 얼마 전 정한수 일병이 소동을 벌이던 곳이었어.
어후..졸라 소름끼치더라구...그래서 우리는 얼른 작업을 멈추고 포대자루를 짊어지고 내려왔지.
모두들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더라구. 그런데 말야..."
전상병의 긴장감 도는 말에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넘기고 있었다.
"포대자루를 뒤집어 쏟아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나자빠졌지."
"뭐..뭣 때문에 말입니까?"
"신발...우리가 주워 온게 나무가 아니었어. 까맣게 색바랜 뼈였어!!"
"예? 뼈 말입니까? 뼈를 나무인 줄 알고 주웠단 말입니까?"
"몰라, 신발...다들 나무라고 생각하고 주워왔는데 뼈였어. 우리는 심장이 멎는듯 했어.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 동물의 뼈가 아니었어.
누가 봐도 사람 뼈였어. 나하고 같이 주웠던 홍상병은 부서진 골반뼈까지 주워 왔더라구."
전상병은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괴로운지 헬멧을 벗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회식은 물 건너 갔지.
혹시나 그 자리가 무연고 무덤일지 몰라서 날이 밝자마자 군청에 신고를 했지.
군청 직원들과 경찰들이 그 구덩이를 둘러쌌지.
여기저기 증거 사진을 찍더니만 군청 직원 얘기로는 거기가 신고된 무덤 자리가 아니라고 하더군.
군청에서 뼈를 모두 수거해갔어. 상당히 많은 뼈가 나왔어. 포대자루로 다섯 포대 이상은 나온 것 같았어.
군청 차량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있는 부대원들은 한결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
정한수...그 자식이 한 말이 떠올랐던거야."
전상병은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신발...나를 진짜로 무섭게 만든건 그게 아니었어."
전상병만큼이나 내 머릿속은 욕설로 가득했다.
'이런..신발 오늘 제대로 걸렸네.'
-계속-
시간이 너무나도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상병의 얘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고통스러웠지만 멈출수 없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의 얘기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귀신을 보는 특별 관리 대상....우린 정한수한테 감히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
심지어 그 놈 동기인 감시병조차 옆에 있길 꺼려했으니까."
"그런데 진짜로 무서웠다는게 뭡니까?"
내 곁눈질을 눈치챘는지 전상병은 고개를 돌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어느 날 정한수와 내가 보급창고 정리 작업을 하게 되었지.
감시병이 면회를 나가서 대신 내가 대타로 있게 된거야.
난 그 놈과 같은 공간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게 너무 무서웠어.
보급 창고 안에는 야전삽부터 시작해서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얼마든지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는 기구들이 가득했거든.
내가 흠찟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정한수가 나에게 말을 걸더라구.
자기를 무서워하지 말래."
전상병은 잠시 자신의 이마를 긁적거렸다.
"이런...안무서워하게 생겼냐? 그건 지생각이고.....
나는 그 놈이 옆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귀신들과 댄스파티를 하는 것 같아 미칠 것 같았지.
고참만 아니었으면 온몸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놓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어디다 묶어놓고 싶었다니까.
정한수가 내게 안도감을 주려는 것 같자 불현듯 나는 묻고 싶은게 하나 생겼지."
"뭘 말입니까?"
"정말로 귀신을 볼 줄 아냐고?"
"........"
"그런데 정한수가 씨익 웃음을 짓는거야.
와...신발....사람이 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렇게 무서운 표정은 처음이었다니까.
해골처럼 마른 얼굴에 늘 두려움의 표정을 짓던 사람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니까 야전삽을 쥐고 있는 내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더라....."
나는 마치 전상병과 함께 그때 그 보급창고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짓던 표정을 없애더니만 정한수가 입을 여는거야.
자신을 몸이 허약한 건 귀신이 잘 붙는 몸이라 그런다는군.
그래서 자기 어머니가 무당이니까 굿도 해보고, 부적도 써보고 그랬대나봐.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귀신은 자기 방 드나들듯이 계속 몸속에 들락거렸대.
몸이 죽을만큼 쇠약해졌는데도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해 입대 신검에서도 2급이 나와서 현역 판정난거래.
그러던 어느 날 정한수 어머니가 자신을 신내림해준 영험한 무당을 찾아가 아들 얘기를 했더니,그 무당도 그러더래.
귀신을 떼어내면 아들이 죽는다고....떼어내서 죽는게 아니라, 빈 자리가 생기면 더 강한 귀신이 붙어서 죽을거라는거야.
그 무당은 고양이의 피를 바른 종이에 기분 나쁜 형상의 그림을 그려넣더니 정한수 어머니에게 건네더라는거야.
그리고는 그러더래. 몸이 돌아올 때까지 몇 년간 이겨내야 할일이 있다는거야.
정한수 어머니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그 늙은 무당이 하는 말이....."
전상병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왜...왜 그러십니까?"
나의 물음에 전상병은 마저 말을 이었다.
"그 늙은 무당이 하는 말이.....부적을 몸에 지니는 순간부터 귀신을 보게 될거라는거야."
"헉!!"
"쪼그려 앉아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야전삽을 손에 쥔 상태로 털썩 주저앉았어...다리에 힘이 풀리더라구.
도대체 그 무당이 정한수에게 무슨 짓을 한걸까 생각해 봤더니....
그 무당이 정한수가 살 수 있도록 선택한 방법은 귀신을 보게 해서 정한수가 귀신을 피해다니게끔 만든거야.
와....신발 조카 똑똑하고 무서운 방법 아니냐?"
나는 차마 전상병의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찌릿한 전기 자극이 주어지는 듯 했다.
"자잘한 몇몇의 귀신들은 잘 피해다닐 수 있었는데, 그날 그 작업이 있던날 귀신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던거지."
"그..그래서 포크레인으로 작업했던 날 이후로 귀신에게 쫓겨다닌겁니까?"
"아니 쫓겨다닌게 아니라 피해 다닌거지...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
정한수가 무서운 얘기를 하나 하는거야."
"또...무..무슨 말 말입니까?"
"거기서 쏟아져 나온 귀신 중 하나가 김창식 일병한테 붙었다는거야."
"김창식 일병이라면....."
"그래. 취사병인 김창식 병장..."
난 순간 숨이 턱 막히며 온몸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와...신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금이 다 저리더라구."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싸늘한 찬바람이 능선 골짜기를 쓸며 내려가고 있었다.
"너 부대에서 가장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누구냐?"
"......."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난 제대로 정신이 박혀있는 부대원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정신병원을 집단탈출한 환자들 뿐이었다.
"너 김창식 병장의 과거를 아냐?"
"모..모릅니다."
"그 사람 칼 다루는 것 본 적 있지?"
"예"
"김창식 일병 원래 특전사에서 특기병으로 있던 사람이야."
"예? 진짜로 말입니까?"
"원래 특전사 요원들은 부사관들이고, 행정은 보통 차출된 사병들이 하거든.
그런데 김창식 병장이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배정 인원이 모두 다 찼었나봐.
그래서 자리가 날 때까지 김창식 병장은 부사관들과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며, 똑같이 훈련을 받았었대.
게다가 칼을 귀신처럼 잘 다뤄서 쌍칼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는거야.
그런데 낙하산 점프에서 착지하다가 허리와 골반을 다쳤나봐. 그래서 우리 부대로 온거야. 그것도 취사병으로.
그 때 취사병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대하면서 김창식 병장이 취사일을 모두 떠맡았지.
그런데...너 김창식 병장 이상한 점 발견 못했냐?"
"이상한 점 말입니까?"
"그래 임마....너도 짧은 시간이지만 김창식 병장 계속 봐 왔잖아."
"저....고..고양이를 무지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고양이를 조카게 싫어해.
너도 알지? 고양이를 불태워 죽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목을 잘라버리기도 하잖아.
너 이 부대 오기 바로 전에 조카 쇼킹한 일이 한 번 있었다."
지금도 쇼킹한데 뭐가 더 쇼킹하단 말인가?
"사단본부에서 취사 검열이 나왔어.
배식 메뉴가 규정을 따르고 있는지, 위생상태가 양호한지, 식자재는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는지 이런걸 검열하는거지.
그때가 겨울이어서 동절기에는 무우를 땅에 묻어야 하거든?
취사장 뒤편에 무우를 묻는 장소가 있어.
그런데 검열관이 보기에 무우를 묻은 무덤이 너무 커보이는거야.
검열관을 보좌하던 선임하사도 의아해 했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지는 검열관이 그 흙무덤을 파보라는거야.
그 때 김창식 병장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더라구....
땅이 꽁꽁 얼었는데 그걸 판다는 건 쉽지 않았지. 결국 곡괭이와 삽만으로 그걸 팠어.
그런데 무우가 묻혀 있는 층 위에 큰 포대자루가 나오더라구.
거기서 뭐가 나왔는지 아냐?"
"고...고양이 말입니까?"
"아니.....고양이 뼈....그것도 살을 발라낸..."
".........."
"그 살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도 취사병이 발라낸 살...."
나는 순간 토가 나올것 같이 속이 부글거렸다.
"김창식 병장은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라구.
어떻게 보면 아주 심각한 일이 될 수도 있었는데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고양이 고기를 먹는 군인들도 있거든...
결국 경고 조치로 끝났지만, 다 들 알고 있었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다들 수근거렸지. 언젠가 김창식 병장은 고양이의 저주를 받아 죽을거라고.
고양이만 보면 눈깔이 뒤집혀. 미친 사람 같애.
그런데 말야. 그 사람 처음부터 그런게 아니었어.
정한수가 나한테 그 말을 해 준 이후에 김창식 병장이 그렇게 변해 가는거야."
"저..정말로 귀신 씌어서 그런겁니까?"
"개나 고양이들은 귀신을 볼 줄 안다고 하잖아. 자신을 알아보는 존재를 다 죽여버리는 것 같애."
오늘 낮에 있었던 김병장의 기이한 행동이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마른 침을 간신히 삼키며 전상병에게 물었다.
"그...그 존재가 사람이라면 어떡합니까?"
-계속-
"사람? 사람이라구? 그...그건 나도 생각 못했던건데..."
나의 물음에 전상병은 적잖게 당황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나를 주시하더니 계속 무언가 머릿속에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는 나에게 가느다란 숨소리로 외쳤다.
"이럴수가!!!!!!!!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지?"
전상병은 놀랍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의 행동을 바라보며 나 또한 놀라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와....신발 이런 반전이 있었네..."
갑자기 전상병이 초소 뒷편에 놓아두었던 소총을 챙겨들었다.
비록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지만, 실탄이 들어 있는 탄창이 끼워져있기 때문에 노리쇠만 후퇴전진시키면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얘기보다 나는 지금의 전상병이 더 무서웠다.
"도대체..왜 그러십니까?"
전상병은 대답을 회피한 채 계속해서 뭔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근무 교대 시간이 되었는지 저 멀리서 작은 손전등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오늘 한 얘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라"
"......?"
"아무에게도 이 얘기하지마. 절대로 입 열지마라."
나는 묵언의 약속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또 다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신발놈. 그럼 왜 처음부터 말을 꺼낸거야?'
취사병 도우미는 좋은 점이 하나 있다. 공식적인 훈련 외에 부대 자체 훈련과 작업에서 모두 열외된다.
그러한 좋은 점이 있음에도 나는 김병장과 함께 하는 일주일의 시간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소원했다.
아침 배식이 끝나고 가스조리기를 열심히 닦고 있는 나에게 김병장이 말을 걸었다.
"니 나한테 할 말 있냐?"
김병장은 내가 힐끔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것 같았다.
김병장은 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옆에서 과도를 돌리며 사과 하나를 깍아내고 있었다.
유난히 그 과도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 눈치를 자꾸 보냐?"
"눈치 보는 것 아닙니다."
김병장은 껍질을 벗겨낸 사과를 과도로 한조각 잘라내더니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우걱거리며 사과를 몇 번 씹더니 눈을 치켜 뜨며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너 어젯밤 어디 근무였냐?"
"..5초소였습니다."
"누구하고 섰어?"
"전대웅 상병입니다."
"전대웅?"
"예. 그렇습니다."
"그 자식이 무슨 얘기 안하든?"
"무슨 얘기 말입니까?"
갑자기 우걱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수세미질도 멈추었다.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 한 적 없냐고?"
순간 등골을 따라 식은 땀이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아..아무 얘기 없었습니다."
김병장이 얼마나 칼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한지를 지금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의 손에 들려진 과도는 손가락 사이를 셀수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김병장은 나를 떠보는것 같았다.
왜 전상병을 의식하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게 분명했다.
그러나 전상병으로부터 들은 얘기만으로도 나는 지금 김병장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너 어제부터 전대웅하고 같은 근무조에 들어간거냐?"
김병장은 다시 한번 사과 한조각을 입에 처넣더니 우걱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수세미질도 다시 시작되었다.
"예....그렇습니다."
"당분간 전대웅하고 근무 계속 같이 서겠네."
"......."
"전대웅이 사단장 빽이다. 너무 많은 말 하지 마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대웅 그 자식, 사단장의 먼 조카뻘되는 사이랜다. 말 조심하라고."
처음 들은 사실이다. 전상병이 그런 사람이었다니...그런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걸까?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때 김병장이 입을 열었다.
"니 오늘 나하고 할 일이 하나 있다."
"무슨 일 말입니까?"
"고양이 좀 잡자."
헉....난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올 것이 온 것 같았다.
".......고..고양이 말입니까?"
"왜? 싫으냐?"
"그..그게 아니라..."
"넌 그냥 고양이를 잡아. 뒷처리는 내가 할테니까"
"그...그런데 고양이를 왜 자꾸 죽이시는겁니까?"
순간 다시한번 김병장의 사과 씹는 소리가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김병장의 오른손에서 시퍼렇게 날이선 칼이 춤을 추듯 돌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후회스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김병장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곧 장마철이다. 게다가 오늘 밤에 비가 온다고 했다. 지금 잡지 않으면 밤에 취사장까지 몰려 들어와.
게다가 장마철 내내 고양이 울음소리에 시달려야 돼. 너 산속에서 비오는 날 고양이 울음소리 들어봤냐?"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기 울음 소리하고 똑같지. 응애응애거리며 울어. 정말 똑같다니까.
비오는 날 새벽에 홀로 취사장에 나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모두 다 잡아내서 국물을 내버리고 싶어진다니까...."
이미 국물을 냈을지도 모른다. 전상병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충분히 그러거도 남을 상황이다.
어쩌면 부대원들은 김병장이 만든 특이한 식재료의 국물맛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새벽 근무때처럼 다시 한번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제가 뭘하면 됩니까?"
"잔밥통으로 드나드는 개구멍 몇개 있지?"
"예"
"거기에 철사줄로 올가미를 열개 정도 만들어서 설치해놔."
"그냥 약을 놓으면 되지 않습니까?"
"안돼. 약을 놓았다가 약묻은 입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이라도 건드리는 날엔 우리가 거품물고 쓰러지는 수가 있어."
나는 그것보다도 김병장이 얼마나 고양이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까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점심 배식이 끝나고 식당 청소를 마친 후 나는 바로 올가미 작업에 들어갔다.
오늘도 역시나 대여섯마리의 고양이들이 콘크리트로 만든 잔밥통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간혹 몇 마리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이 올가미가 곧 자신들의 사형도구가 될거라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태연스럽게 나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가 잔밥통으로 드나드는 군데군데 분포한 개구멍에 작은 철사 올가미를 설치했다.
밤 사이에 고양이 몇마리가 걸려들것이다.
좋지 않은 예감이 온 몸을 감쌌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저 멀리서 불길한 구름떼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녁에 들어서자 하늘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아 야간 근무자들은 판초우의를 챙기기 시작했다.
점호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지에 쌀알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넘쳐 흘렀다.
12시 근무인 전상병과 나는 말없이 5초소 근무지를 향했다.
"도대체 저기 5초소가 왜 있는겁니까?"
"알고 싶냐?"
"어젯밤 저에게 말을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
전상병은 우의속에 감춰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굵은 빗줄기가 멈추지 않고 쏟아지자 우의를 뒤집어쓴 몸에 습기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정한수란 일병이 누굽니까?"
전상병은 여전히 우의 속에 얼굴을 감춘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부대에 없어."
"전출갔습니까? 아니면 의가사제대라도..."
"....죽었어.."
"예?"
"죽었다구...."
"어..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했어."
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자살했습니까?"
"부적을 누가 훔쳐갔어."
"누가 말입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걸 알았으면 정한수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을테니까."
"그깟 부적이 없어졌다고 자살을 한 겁니까?"
"쏟아져 나온 귀신이 어디에 붙었겠냐? 지 입으로도 자기는 귀신이 잘 붙는 몸이라고 했는데.
미친놈처럼 하루종일 찾아 헤맸지. 그런데 어느 날 밤 사이에 정한수가 없어졌어.
인원 점검을 하던 내무반 불침번이 밤 사이에 정한수가 없어진 것을 보고 보고했지.
한밤에 전 부대원들이 일어나 정한수를 찾아나섰어. 그러다 결국 목매단 시체로 발견되었어."
나는 설마하는 마음에 내 생각이 맞지 않기를 바라며 전상병에게 물었다.
"어...어디서 죽었습니까?"
나의 물음에 전상병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잠시 나를 응시하던 머리를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켰다.
내 예상대로 5초소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달렸다.
나는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귀신이 쏟아져 나왔다는데....그것도 사람이 자살한 자리에 왜 초소를 만든겁니까?"
"근무 시간 늦는다. 빨리 가자."
전상병은 대답을 회피한 채 아무 일도 아니란 듯 걸음을 재촉했다.
5초소가 십수미터까지 다가오자 이전 근무자의 수하소리가 들려왔다.
"손들어..움직이면 쏜다. 벽돌!!"
"......."
그런데 왠일인지 전상병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암구호에 응답하지 않았다.
"벽돌!!"
"전상병님..."
"벽돌!!"
나는 급한 마음에 대신 암구호에 응답했다.
"하늘!!"
수하에 불만이 있었는지 전 근무자 사수가 손전등을 비추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또한 그에게 손전등을 비추었다.
전대웅 상병 동기인 박상병이었다.
"대답 빨리 안하냐?"
박상병의 질책에도 전상병은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았다.
전상병의 응답이 없자 박상병은 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취사장 쪽에서 움직이던 것 너희들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어."
"누...누가 말입니까?"
"신발..나도 모르니까 물어본 것 아냐!!"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화가 나서인지 모르게 박상병은 짜증을 냈다.
박상병의 부사수인 조이병은 이미 알지 못하는 어떤 공포에 시달린듯한 표정이었다.
초소 천장을 뚫어버릴 기세로 빗줄기가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조금전부터 내 뒷편에 앉아 아무 말없이 입을 닫고 있는 전상병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전상병님....어디 아프십니까?"
내 말은 듣고 있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는데 모른척 할뿐이지."
"뭐...뭐가 말입니까?"
"이맘때쯤이면 비오는 밤마다 돌아다니는 그 정체가 뭔지를...."
난 전상병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말하는 그 정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싸늘한 한기가 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놈을 잡기 위해 이 5초소가 생긴거야."
그...그 놈이 누굽니까?"
예의상 전상병에게 질문을 했지만 여전히 나는 전상병의 답변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곧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너도 알잖아. 누구일지."
나는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자살했다는 정..정한수라는 사람 말입니까?"
"......"
초소 천장을 뚫어버릴 듯한 기세의 빗방울 소리가 전상병의 대답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그 사람인지 어떻게 압니까? 누가 봤습니까?"
"......"
내 뒷편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지 모를 전상병은 나의 물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전상병님..."
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난 알고 있어."
"...예?"
"............"
나는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켰다.
"뭐..뭘 말입니까?"
그러나 전상병은 대답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우리 둘은 깊은 침묵속에 오랫동안 빠져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었을까?
멍하니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가 깨닫지 못한 것이 눈 앞에 나타났다.
십수미터 앞 커다란 아카시 나무 옆에 누군가가 판초우의를 뒤집어 쓴 채 어둠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군가 순찰중이라면 손정등도 켜지 않은 채 저 어둠속에서 가만히 서 있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지금은 근무 교대시간도 아니다.
"저....전상병님..."
"...."
"누...누가 앞에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둠속에서 그것도 빗줄기가 쏟아지는 곳에서 그가 보이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나는 그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길게 늘여진 판초우의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작은 키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고 보고 있었다.
내가 전상병을 다시 부르려고 하자 그는 일어서서 이미 내 곁에 서 있었다.
그러나 전상병은 그 어둠속의 형상을 찾지 못하는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서서히 눈 앞에 나타난 어둠 속의 사내가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밖으로 나가 수하를 하기 위해 초소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전상병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제지했다.
"나가지마..."
"예?"
"모른 척 해"
"무...무슨 말씀이십니까?"
"쳐다보지마....눈 감어."
"도..도대체 무슨 말....."
"그냥 내 말 들어!! 신발놈아!!"
이미 전상병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전상병이 왜 공포스러워하는지 그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나도 깨달았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총을 쥐고 있는 손의 악력만큼이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저 앞에 서 있는 정체가 전상병이 말한 그것이란 말인가?
삭신이 저리고 온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정체가 서서히 내 코 앞까지 도달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싸늘한 한기가 주변을 감사고 있었다.
몇 십초가 흘렀을까?
나는 질끈 감았던 눈꺼풀의 힘을 뺐다.
그리고 실눈을 조심스럽게 뜬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전상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전..전상병님...지금 무슨 일입니까?"
"발 봤어?"
"예?"
"다가올 때 발이 보였냐구? 걸을 때 판초우의 펄럭이는 것 봤어?"
"그게...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이 발을 보지 못했다. 정말로 보지 못했다. 머리가 핑 도는 듯 아찔해졌다.
그가 키가 작아서 판초우의가 거의 땅에 닿을 듯 스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줄을 타고 내려오듯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미친듯이 왼손으로 얼굴을 비벼댔다. 그리고 답을 했다.
"못 봤습니다."
나의 대답에 전상병을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너 귀신 볼 줄 알아?"
"제..제가 어떻게 귀신을 봅니까?"
"지금 니가 본거잖아."
헛것을 봤다고 말해야 하는데,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미 내 시각중추에 저장된 정보는
내가 본 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되뇌이고 있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나는 초소문을 박차고 나가 쏟아지는 장대비에 몸을 맡겼다.
뭐 이런 성기같은 부대가 다 있냐?
나는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터질 듯 했다.
"이창훈... 너 왜 그래? 미쳤어 새꺄?"
나의 기이한 행동에 전상병이 열이 받았는지 내 등뒤에서 욕설을 내뱉았다.
그냥 나는 얼굴에 비를 맞으며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천천히 뒤돌아 전상병이 서 있는 초소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공포에 질리다 못해 나는 분에 받친 눈물을 쏟아냈다.
초소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전상병 옆에 또 한명의 누군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조준에 놀란 것은 전상병이었다.
"야이 강아지야!! 너 지금 뭐하는거야!!"
나는 전상병의 외침을 무시한 채 멜빵에 매달린 손전등을 집어들고 초소안을 비췄다.
불빛과 동시에 그 형상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나의 공포는 거기서 멈춘것이 아니었다.
전상병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나를 향해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야 신발놈아 총 안 내려!!!"
"에이...신발 피...."
"뭐?"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신발 왜 어깨에서 피를 흘리냐고!!"
"너...지..지금 뭐라 그랬어?"
나의 외침에 전상병은 미친 듯이 양쪽 어깨를 쓸어내렸다. 나만큼이나 전상병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와중에 내 눈에 또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김....선호...."
나의 세 음절에 전상병은 어깨를 쓸어내리던 행동을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부릅 뜬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너...이 강아지...지...지금 뭐라고 그런거야?"
"이...신발 니 명찰에 써 있잖아 신발!!!"
지금은 고참이고 뭐고 없었다.
둘 중에 하나는 지금 귀신들려 누구를 죽이던가 아니면 아랫턱에 총구를 대고 자살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는 죽기가 싫었다.
전상병은 천천히 초소문을 열고 나와 빗속에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너...지금 했던 말 다시 해봐."
"...."
나의 대답이 없자, 갑자기 전투화 바닥이 내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내가 수미터를 나동그라지자 전상병은 번개처럼 달려와 내 멱살을 쥐고 다시 물었다.
"너 신발놈아!!! 방금 전에 무슨 이름 얘기 했잖아!!! 다시 말해봐!!!"
나는 코와 입속으로 쏟아지는 빗방울 때문에 대답은 커녕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가슴에 붙어있는 이름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명찰 속의 그것이 아니었다.
전대웅....그의 명찰이었다.
그 귀신이 누구에게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미친게 틀림없었다.
"기....기억이 안납니다."
나는 이 무서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전상병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의 대답과 함께 전상병은 내 멱살을 더 강하게 틀어쥐었다.
"콜록..콜록..."
"이 신발놈아. 거짓말 하지마. 너 아까 뭐라고 이름 불렀잖아."
"콜록...콜록..."
나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아아아악!!! 신발 모른다고!!!!!!"
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멱살을 쥔 전상병의 손목을 틀어잡고 그를 향에 달려들었다.
장대비속에서 몇 초간 엎치락 뒤치락 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거기서 뭐하는거야!!!"
순찰을 돌던 당직사관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행정실에서 머리를 박고 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근무자끼리 쌈질을 해?"
당직사관인 선임하사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전상병과 나를 향해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뱉았다.
"야..이창훈."
"일병, 이창훈!!"
"너 미친것 아니냐? 니 고참한테 어떻게 대들 생각을 하냐?
아무리 요즘 군대가 당나라 부대가 되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대웅이 너는 고참이라는 새끼가 쫄따구하고 쌈질이나 하고 자빠졌냐? 응?
너희 두 놈 중대장이나 대대장 알면 최소 군기교육대야... 알아?"
"......."
그러나 이 순간 그 것보다 다른 걱정거리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계속-
묵언의 합의하에 전상병과 나는 몸싸움의 이유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몇 마디 나의 욕설로 인해 싸움이 일어났다는 전상병의 그럴싸한 시나리오로 마무리되었다.
한차례의 푸닥거리가 끝나고 나와 전상병은 내무반으로 들어섰다.
일병 찌끄레기가 상병 말호봉하고 몸싸움을 하다니.....
수 많은 고참들의 압박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 고참 몇몇이 잠을 이루지 않고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친개 최병장이었다.
어둑어둑한 와중에서도 칼자국 같은 눈 밑의 흉터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으로 보였다.
내가 그의 앞을 지나가는 내내 최병장은 검게 그을린 얼굴속에 박힌 하얀 안구의 초점을 내게 계속 맞추었다.
그의 뒤를 이어 몇몇 고참들의 따가운 시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밤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을까?
날이 밝을 때까지 몇 번을 불러나갈까?
어떤 놈의 주먹이 제일 아플까?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을 쯤 최병장이 입을 열었다.
"내 밑으로 아무도 건들지 마."
순간 안도의 한 숨이 나도 모르게 내쉬어졌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최병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전상병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그 둘은 밖에서 조용히 뭔가 정보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침상에 누워있는 동안 여러가지 소리들이 자그맣게 들려왔다.
최병장이 계속의 뭔가를 캐묻는 것 같았고, 전상병은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을 수차례 하는 듯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내가... 전상병은 보지 못한 귀신을 본 걸까?
그 귀신이 죽었다는 정한수인가? 정한수는 정말 자살한 걸까?
그런데 김선호가 누굴까? 전상병의 명찰은 분명히 김선호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적어도 우리 부대에는 김선호가 없다.
왜 김선호라는 이름에 전상병이 미친 사람처럼 내게 달려든 걸까?
"이창훈 너는 당분간 위병소 근무서라."
날이 밝자 당직사관인 선임하사가 명령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고참이 좀 괴롭혀도 참아야 되는게 군대생활이다. 니 고참들은 더한 고생 참아가며 작대기 하나씩 올린거다.
고참이 좀 못되게 굴었다고 몸싸움하면 대한민국에 남아날 군대 없다.
중대장이나 대대장한테는 보고하지 않을테니까 당분간 몸 조심해."
"네. 알겠습니다."
머릿속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선임하사가 이상한 말을 내뱉았다.
"그런데 전대웅이 공수부대 출신이라 힘이 장사였을텐데 너도 참 대단하다. 그 놈하고 몸싸움 할 생각을 했으니"
"!!!!!!!!!"
이게 무슨 말인가? 전대웅 상병이 공수부대 출신이라니.....
"특..특전사 말입니까?"
"그래 임마. 거기서 훈련하다가 다쳐서 왔다는데 사병 세 명을 한꺼번에 일반 부대로 오기는 아주 드문 일인데...."
"나머지 두 명이 누굽니까?"
"전대웅이하고, 김창식...그리고 최병희.... 벌써 생김새 보면 딱 티가 나지 않디?"
"모...모두 같은 부대에서 온 겁니까?"
"그래. 군대에서 아주 희귀한 일이지. 특히 전대웅은 사단장의 먼 친척뻘이랜다. 말썽일으키지 마라."
이럴 수가.... 전상병, 김병장, 미친개 최병장이 모두 같은 부대에서 전입 온 병사라니...
전상병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 것일까?
낮 3시 근무였지만 간간히 하늘을 덮고 있는 구름으로 인해 뙤약볕은 피할 수가 있었다.
위병소 초소 밖에 나와서 근무를 서는 나와 달리 내 사수는 초소 안에서 뭔가를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수미터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연륜이 느껴지는 얼굴 생김새와는 달리 그녀의 피부는 생각보다 매끈하였고, 보통의 요즘 여자들과는 달린 쪽진 머리가
곱게 빗어 넘겨져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녀는 한참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니 내게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멈춰섰다.
"누구 면회 오셨습니까?"
나의 물음에 갑자기 그녀의 양볼에 검은 색 마스카라줄기가 흘러내렸다.
두 줄기의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음에도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는 듯 보였다.
나는 뜬금없는 상황에 초소안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사수를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이내 나는 그 행동을 멈춰야만 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을 찾아주시게"
"..예?"
"내 아들을 찾아주시게"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나는 면회객 일지를 집어들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드님의 계급과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나는 관례상 그녀에게 묻고 있었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면회객 같아 보이지 않았다.
"......."
그녀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나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드님이 누군지 말씀하셔야 부대에 연락...."
"죽었다오"
"!!!"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는걸까?
그녀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지금쯤 병장이 되었을 것이오"
면회객 일지에 쓸 내용이 없었지만, 오른손에 쥐어진 펜은 이미 나의 떨리는 손의 자취를 그리고 있었다.
"아드님...이름이....."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는 심정에 그녀에게 답을 확인하고 있었다.
"정한수라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그녀는 눈 한번 깜박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원귀가 되어 이 곳을 떠돌고 있소. 찾아주시오."
도대체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이런 오금저리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시선을 내리고 천천히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그녀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기를, 아니 그냥 떠나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내가 등을 돌려 발을 떼려는 순간, 그녀는 말 한마디로 내 발걸음을 붙잡고 말았다.
"그 아이를 찾지 못하면 부대원들이 죽어 나갈 것이네."
등골이 싸늘하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들이 죽은 뒤로 수없이 천도제를 지내게 해달라고 부대에 부탁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네.
아들이 원귀가 되어 이 부대를 떠돌고 있음에도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더이다."
"그런데 왜 우리 부대원들이 죽을거란 말입니까?"
나의 물음에 그 여자는 울먹이는 표정을 멈추고 갑자기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서로 간의 처절한 살생이 일어날 수 있지. 자네도 어제 사람을 죽이려하지 않았는가?"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면회일지와 펜을 들고 있는 두 손이 동시에 떨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 속이 매말라가고 있음에도 한 모금의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하얀 피부에 검게 그어진 세로선이 그녀를 마치 저승사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그런데 왜...왜 접니까? 왜 제가 아드님을 찾아야 합니까?"
그녀는 한 동안 입을 다문 채 계속해서 나의 눈치를 살폈다.
"사자(死者)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사..사자라니오?"
"죽은 자의 기운이 느껴져...."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위병소가 떠나가라 호통치듯 소리쳤다.
"곧 죽음에 직면할거라는 말일세!!!"
이런...신발..
내가 죽는다구? 정말 내가 죽는다구? 이 신발 미친 여자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거야?
이 기분 나쁜 여편네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힘껏 땅바닥에 내팽겨치기라도 해야 하나?
이 총의 개머리판으로 독사같은 그 주둥이를 뭉개버려야 하나?
삽탄된 총의 노리쇠를 당겼다가 놓기만하면 총알이 장전된다.
이 여자는 내가 격분하여 자신의 몸뚱아리에 총구멍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나 있는걸까?
그 여자의 저주같은 독설보다 더 사악한 방법의 폭력과 위협을 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단순했다.
이미 나는 그녀의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기운에 주눅들어 있었다.
"아..아들을 찾으려면.. 제가 그럼 뭘 해야 합니까?"
-계속-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 또한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며 그녀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잠시 후 그녀는 상의 깊숙히 숨겨두었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붉은빛의 주머니였다.
"뭡니까?"
"부적일세."
"부적?"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라네."
'삶과 죽음의 경계?'
순간 나는 얼마 전 전상병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한수 어머니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그 늙은 무당이 하는 말이..부적을 몸에 지니는 순간부터 귀신을
보게 될거라는거야.]
헉...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머릿속에 저장된 여러가지 정보가 길을 잃은 듯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는 이내 허탈감을 이기지 못한 듯 조용히 말이 튀어나왔다.
"귀...귀신을 본다는 그 부적?"
작은 나의 목소리에도 그녀는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 걸 어떻게 아는가?"
"아드님이 죽기 전에 제 고참한테 그 부적이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말해줬답니다."
나의 대답에 그녀는 또 한번 눈물을 글썽거렸다.
"미안하네....정말로 미안하네....흑흑.."
"아드님도 찾고 저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 목숨까지 건질 수 있다는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녀는 이내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개의치않고 그녀 손에 쥐어져 있는 주머니를 빼앗듯 집어들었다.
"이제..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눈물을 거둔 그녀는 내가 해야 될 행동들을 나열하듯 설명했다.
"그 주머니 안에는 빨간색과 노란색 두 종류의 부적이 있다네.
오늘 밤 해시에 노란색 부적을 태우고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게."
"해시라면...?"
"오늘밤 9시에서 11시 사이일세. 그리고 빨간 부적은 네 장이 있는데 하나만 남겨두고 몸이 닿는 곳에 가까이 두게."
"그...그러면 그 때부터 뭐가 보이는 겁니까?"
"그렇진 않다네. 효력이 언제부터 발생할지는 나도 모른다네."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행여 귀신을 그 때부터 보더라도 놀라지 말게나.
아는 척도 하지 말 것이며, 절대로 말을 걸어서도 안되고, 눈을 맞추어서도 안된다네.
자네가 귀신을 볼 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네 몸을 빌어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네."
그녀의 말에 갑자기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그럼 아드님은 어떻게 찾습니까?"
"남은 한 장의 붉은색 부적을 넘겨주게. 그리고 이 어미의 말을 전해주게....흐흐흑...."
서글픔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그녀는 연신 닭똥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이제 살아있는 사람에서 더 이상 해를 입히지 말고 떠나달라고...어미가 간절히 바란다고..
그리고 짧은 인연이지만 이승에서나마 부모 자식으로 만나줘서 고마웠다고......흐흐흑
이승의 연이 길지 않았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아달라고 전해주게...흐흐흑"
그녀의 울음에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전..아드님 얼굴을 모릅니다."
"주머니에 작은 사진이 들어있네...."
근무가 끝난 후 나는 내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주머니를 매만졌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아니...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가?
두려움, 공포, 무력감, 후회...또는 기대...하나로 정할 수 없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제 이후로 전상병이 조금씩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도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관심도 없는 듯 숟가락을 뜨고 있었다.
근무시간이?한 시간 가량 남았음에도 근무 복장을 챙기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치만 살필 뿐 아무런 안부나 위로의 말도 던질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거지? 그리고 복장은 왜 저래?'
내가 여러 생각에 잠겨 있을 쯤 선임하사가 앞에 나서 무언가를 하달했다.
"밥먹고 나서 오늘밤 8시부터 9시 반까지 야간 침투훈련 실시한다."
여기저기서 허탈감에 빠진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내일 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일 하루종일 비가 온단다. 비 맞으면서 훈련하고 싶은 놈은 내일 해도 돼.
그리고 취사반은 훈련 열외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선임하사의 말에 더 이상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밥먹고 나서 고양이 올가미 설치해라."
이 와중에도 김병장은 고양이 죽이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김병장이 내 앞에 나타나 말을 걸었다.
"또..말입니까?"
순간 아차 싶었지만 김병장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취사장 뒷편에서 나는 올가미를 만들 철사 줄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잡힌 고양이들은 지금 어디 있는걸까? 김병장이 삶아 먹었나? 아니면 오늘 고깃국에 넣은 걸까?
여러가지 생각에 올가미 설치가 늦어질 쯤 서서히 땅거미가 취사장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결국 김병장의 명령대로 다시 잔밥통 주변의 개구멍에 올가미를 설치했다.
취사장 일이 끝나고 나는 아무도 없는 내무반에 앉아 그 무당이라는 여자가 주고 간 부적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드디어 그 여자가 말한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지만, 나는 조용히 내무반을 빠져나와 내부반 뒷편 으쓱한 곳에서 조심스레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두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오늘 밤 해시에 노란색 부적을 태우고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게.]
시간이 아홉시가 넘었음을 확인한 나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그 노란 부적에 불을 붙였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난 이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부적이 나와 부대원의 목숨을 구하고, 이 부대의 알 수 없는 비밀을 풀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닥에 깔아놓은 하얀 종이 위에 회색빛으로 노란색 부적의 재가 모아졌다.
나는 물이 담긴 컵에 그것을 털어넣고 한모금에 마셔버렸다.
'이제...뭐가 보인단 말이지?'
그 여자도 확신하지 못하는 결과를 나는 이미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붉은색 부적을 온 몸 이곳저곳에 쑤셔넣었다.
이 때 내무반과 붙어있는 행정반에서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강아지야!! 실탄이 든 탄창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누군가와 전화상으로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근무자가 틀림없었다.
"뭐? 실탄?"
불현듯 낮에 그녀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 아이를 찾지 못하면 부대원들이 죽어 나갈 것이네.]
"신발...귀신이 실탄을 가져갈 일도 없고......"
그 순간 저녁 시간 때 넋을 잃은 모습으로 밥을 먹던 전상병이 떠올랐다.
"전대웅!!!"
나는 야간 침투 훈련이 실시되고 있는 취사장 뒷편의 야산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취사장 쯤 도달하자 올가미가 설치된 잔밥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 낯선 이도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총을 메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잔밥통 앞에서 허겁지겁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누구...?"
그 순간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행여 귀신을 그 때부터 보더라도 놀라지 말게나. 아는 척도 하지 말 것이며, 절대로 말을 걸어서도 안되고,
눈을 맞추어서도 안된다네]
미친 듯이 숟가락질을 하던 그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헉....신발...'
삼장이 터져나갈 듯 요동치고 있었다. 전기에 감전이 된 듯 오금이 저리로 발을 한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 한걸음씩 그의 옆을 스쳐 지나기 시작했다.
곁눈질이었지만 그는 전쟁 중인 군인 같았다. 땀인지 피인지 모르는 검은 액체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듯 보였다.
무서워서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수미터 이상을 더 걸었다. 그제서야 내 뒤편에서 바쁜 숟가락질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수십미터 앞에 구름 사이로 비친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 훈련 중인 부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간 침투 훈련이라 모두 자세를 낮추고 매우매우 느린 속도로 산정상을 향해 걸어나갔다.
풀섶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를 반복하며 부대원들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부대원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계속-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제촉했다.
양쪽에 검은 산능선을 끼고 억새풀과 잡초로 우거진 평지에서 부대원들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다.
누가 누군지 잘 구분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둠속에서 그들을 뒤따르며 숨죽인 목소리로 선임하사를 불렀다.
"선임하사님...."
나의 목소리가 작았는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라도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조금 가까이 접근하여 그를 불렀다.
"선임하사님...?"
그러나 이내 그 부름을 멈춰야만 했다.
내 앞에서 산정상을 향해 소리없이 전진하는 그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소리없이 전진하는 그들.......정말로 억새풀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서 그렇게 뒹굴다가 왔는지 하나같이 흙투성이가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누군가 뒤돌아 보기를 바라며 선임하사를 불렀지만, 지금은 누군가 뒤돌아 볼까봐 가슴을 졸여야 했다.
"너...이창훈 아냐?"
순간 내 등 뒤에서 나를 알아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선임하사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부릅 뜬 눈으로 선임하사를 쳐다보았다.
"너 이 자식...여기서 뭐하는거야?"
나는 다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억새풀 사이를 스치는 싸늘한 바람 소리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등골을 찢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힘겹게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야..임마. 여기서 뭐하는거냐니까?"
"다...다들 어디 갔습니까?"
"이 자식이 귓구멍에 전봇대를 박았나...아까 훈련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다 들 어디에 있습니까?"
"매복 중이잖아."
그제서야 나는 선임하사 뒤 풀숲 사이에서 나를 쳐다보는 여러 개의 눈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 가던 부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이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부대?"
역시 선임하사는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전대웅 상병 어딨습니까?"
"전대웅? 전대웅은 왜?"
그 순간 어둠에 묻힌 풀숲 사이에서 누군가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선임하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무시한 채 풀숲을 헤치고 그를 향해?걸어갔다.
"야! 이창훈!! 저 새끼가 미쳤나?"
선임하사의 욕설과 분노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상병의 앞에 서자마자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소총의 총부리와 개머리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전상병은 내게 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나보다 더한 힘을 주어 움겨 쥐었다.
나 또한 이제 질세라 입을 굳게 다물고 그가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더욱 세게 총을 움켜 쥐었다.
나의 손과 팔은 힘에 겨워?떨림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전혀 힘들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물었다.
"너...뭐하는 새끼야?"
그의 부릅 뜬 두 눈과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은 그가 제정신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다.
"너....너 누구야? 총 이리 내.."
나의 물음에 그는 살기가 묻어나오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재빨리 그의 총에서 탄창을 분리하였다.
"퍽"
그와 동시에 그가 휘두른 소총의 개머리판이 내 가슴에 떨어졌다.
나는 수미터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으..윽...."
탄창을 손에 쥔 채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나에게 선임하사가 달려왔다.
"이 강아지들!! 뭐하는거야!! 또 쌈질이야!!"
선임하사의 호통 소리에 짙은 어둠 속에서 매복해 있던 십수명의 부대원들이 풀숲 사이에서 일어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창훈..너 이 새끼 훈련장 와서 뭐하는 짓이야?"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오른 손에 쥐고 있던 탄창을 확인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빈 탄창이 아닌 실탄이 들어있는 탄창이었다.
"뭐야 이거......"
내 오른손에 쥐어있는 탄창을 본 선임하사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실탄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실탄을 끼워넣는 자리에 붙여놓은 봉인딱지가 보이지 않았다.
"헉....한 발이 장전되어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나는 용수철에서 튕겨 나가 듯 전상병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야아아아아!!"
"탕!!!"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함께 고막을 파열시킬 듯한?천둥소리가 내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주변의 산능선을 타고 총소리의 메아리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희뿌연 영상에서 소란스런 주변의 목소리들이 자그맣게 들려왔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임하사가 나를 향해 뭐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고막을 진동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초첨을 맞추려고 애를 썼지만, 내 눈앞의 영상은 서서히 어둠속에 묻히고 있었다.
"이창훈 일병? 정신이 드나?"
의사 복장을 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힘없는 눈으로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니 이 곳이 의무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를 깨운 사람은 군의관이었다.
"천만 다행이네. 총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어. 1센치만 안으로 들어가 스쳤어도...자넨 죽은 목숨이었을거야."
몸을 일으키자 잠시 오른쪽 이마 부분이 욱신거렸다.
붕대 대신 커다란 반창고가 이마에 붙여져 있었다.
군의관은 병실에 있던 전화기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내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부대로 복귀해도 되네. 그런데 먼저 헌병대를 들렀다 가야겠네."
"헌...헌병대 말입니까? 헌병대를 제가 왜 가야 합니까?"
"총기 사고는 일단 헌병대 조사를 받게 되어 있어. 수사관이 사건 경위에 대한 조서를 꾸밀 수 있도록 진술을 해야 돼."
".........."
군의관은 잠시 내 머리맡에 있는 작은 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거 자네건가?"
"뭐..뭡니까?"
"부적 같아 보이던데...자네 옷에서 나왔네."
"네...."
"후후...부모님이 주신 건가 보지?"
"........"
군의관은 봉투를 나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다시는 의무대에 올 일이 없길 바라네."
태어나서 처음 대면하는 군수사관이라 논리적인 진술을 하려는 생각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음...그러니까 전대웅 상병이 다음 근무자에게 넘겨줘야 할 실탄이 든 탄창을 숨기고 빈 탄창을 넘겨줬다?"
"네. 그렇습니다."
수사관은 연신 손가락 사이로 펜을 돌리며 치켜 든 눈으로 힐끔힐끔 나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도 전대웅 상병일거라고 생각을 못했다는데 넌 그 걸 어떻게 알았지?"
"그..그냥 수상했습니다."
"....."
"그냥 낮부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이상해 보였습니다."
"....뭐야? 그게 다야?"
나는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냥 직감적으로...."
수사관은 펜을 입에 물고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대웅은 군검찰로 이송되서 재판을 받을거야. 혹시 군검찰에서 소환명령이 떨어져서 증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돼. 전대웅도 지금 자신이 한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조금이라도 제 3자가 믿을 만한 말을 해야지. 안 그래?"
"......"
"음...좋아. 일단 여기까지 하자."
수사관은 조서 작성을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날 따라와. 전대웅이 너하고 면담을 원한다."
"절 말입니까?"
"너 한테 사과를 하고 싶단다."
유치장의 철창살을 가운데 두고 전상병과 나는 마주 앉았다.우리는 한참 동안을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만 하였다.
"미안하다..."
전상병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까맣게 그을린 두꺼운 살더미 사이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 분간하기 힘든 눈시울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 또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그 걸 왜 나한테 물어? 다친 건 너잖아..."
나는 이마에 붙여진 커다란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에 전상병도 눈물어린 표정의 미소로 답하였다.
어젯밤에 보았던 그 살기어린 눈빛은 온데간데 없고 , 지금 내 앞에는 장난끼 가득한 어린 아이가 있었다.
"너...사회에서 만났으면 그냥 좋은 친구였을텐데....어쩌다가 군대에서 고참 쫄따구로 만나서 이 고생이냐.."
"......."
나는 잠시 말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수미터 떨어져 우리를 지켜보던 수사관이 자신의 시계를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난 밖에 나가서 담배 한대 피고 올테니까, 얘기 잘 마무리 해라."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한 전상병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입가의 미소를 지우더니 조심스레?입을 열었다.
"내 얘기 잘 들어...."
"나와 김창식 병장, 그리고 최병희 병장은 OO공수여단에서 사병으로 근무했어."
"..선임하사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그래...알고 있었군. 원래 공수여단은 부사관으로 꾸려지지만, 전산이나 행정같은 업무는 주로 사병들이 맡아.
그런데 TO가 다 차면 전입한 사병들도 어쩔 수 없이 부사관들과 훈련을 같이 받지.?
*** TO(티오) : TO는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서 정원(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을 뜻한다.***
우리 세 명은 TO가 차는 바람에 모두 부사관들과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며 훈련을 받았던 거야.
그 와중에 김창식 병장이 낙하산 강하훈련 중에 허리와 골반을 다쳤어.
얼마 뒤 김창식 병장은 취사반에 배정 받아서 그 때부터 취사일을 배우게 된거야.
그 부대엔 최병희 병장보다 고참인 한동철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칼을 엄청나게 잘 다루는 사람이었어.
김창식 병장도 그 사람한테 칼질을 배운거야.
굉장히 우직하고, 말이 없는 성격이었어. 훈련이고 뭐고 맡겨진 일은 철두철미하게 수행했지.
그래서 간부들이 항상 부사관들 못지 않다며 항상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어.
게다가 우리들에게도 훈련비법 같은 것을 항상 전수해 주며 부사관들보다 뒤쳐지지 않도록 도와줬어.
사병들이 훈련에서 부사관들보다 뒤쳐지는 것을 한동철은 죽기보다 싫어했지.
그런데 문제는.........한동철이란 그 사람은 조울증인지 뭔지 알 수없는 정신병 같은게 있었어.
한 번 머리가 돌아버리면 습관적으로 칼을 던져. 지금의 김병장이 하는 것처럼 말야.
그런데 김병장도 따라할 수 없는 더 섬찟한 것은?사람을 세워놓고 칼을 던지기도 한다는거야.?
서커스에서 사람 세워놓고 빈 자리에 칼을 던져서 맞추는 것처럼 말야.
그럴 때는 미친 놈이 따로 없었어. 나는 졸병이어서 당한 적이 없었는데 김창식 병장과 최병희 병장은 많이 당한 것 같았어.
너도 알다시피 김창식과 최병희도 보통 성격이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동철 앞에서는 꼬리내린 강아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한동철한테
길들여졌었는지 알 수 있었지.
나도 언제 당할 지 몰랐어.
너무나 무서웠던 나는 부사관이나 부대 간부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까도 했지만, 솔직히 한동철을 처벌하기도 전에
한동철의 대검을 먼저 맞을 것 같았어.
조금만 버티면 됐었어. 6개월만 버티면 그 놈은 제대하거든...
그런게 그렇게 좋으면 부사관으로 지원해서 빡세게 군대생활 하든지 그랬어야 하는데, 자기는 재수가 없어서 이런데
배치 받았다며 늘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지.
게다가 한동철은 부사관들을 너무 싫어했어.
자기보다 나이 어린 하사가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걸 굉장히 혐오스러워 했지.
늘 어떤 아무개..아무개 놈들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곤 했어.
그래서 한동철은 부사관들에게 지지않기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훈련을 받았는지도 몰라.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한동철은 학력 컴플렉스까지 있었어.
대학물을 먹은 나같은 애들을 쓸데없이 갈구기도 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나는 처음 듣는 괴담같은 얘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니가 말한 김선호...김선호라는 신입병이 들어왔는데, 이 자식도 TO가 차는 바람에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게 된거지.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김선호는 내무반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녀석이었어.
덩치도 크고, 우람했지만 친구도 없어서 하루종일 pc방에서 게임을 하든가, 아니면 프라모델 장난감이나 혼자 조립하고 있을
그런 어리숙하고 착하게 생긴 계집애 같은 성격의 녀석이었지. 목소리도 여자 같아서 부사관들이 항상 '우리 선숙이..선숙이..'
이러면서 엉덩이를 툭툭 치며 여자처럼 대하기도 했어.
낙하산 강하, 천리 행군, 생존 훈련....김선호는 도저히 이런 것들과 어울리지?않을만큼 체력적으로도?약했어.
간단한 구보만 해도 뒤쳐지기 일쑤였어. 늘 부사관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지.
부사관들의 놀림거리가 된 그런 김선호를 한동철은 너무나도 싫어했어.
게다가 김선호는 한동철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인 유명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거든.
어쩌다 그런 녀석이 공수부대에 오게 되었는지 당최 알 수 없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단본부 전산 특기병으로 오게 된거야.
그런데 TO가 다 차서 당분간만 내무반 생활을 같이 하게 되었던거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지상공수훈련이 있었던 날이였어.
부사관들과 내무반 소속 사병들은 단 한명의 열외도 없이 막타워에서 줄을 메고 강하훈련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김선호 차례가 된거야.
어땠겠냐? 응?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난리가 난거야. 막타워 점프대 입구에서 울고불고...
김선호 입장에서는 줄 하나에 목숨을 맡기고 막타워에서 뛰어내린다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냐?
말도 마라. 조교들은 정신봉이란 죽도를 들고 다니거든?
훈련에서 뒤쳐지거나 지시에 잘 따르지 않으면 그 죽도로 사정없이 내려쳐.
물론 외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 그냥 정신차리라는 신호 중의 하나야.
김선호는 조교가 죽도를 미친듯이 내리쳐도 뛰어내리지 않는거야.
점프대 아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부사관들은 배꼽을 잡으며 다들 뒤집어졌지.
어떤 부사관들은 '선숙이'를 외치며 환호를 보내기도 했어.
그런데 거기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동철도 있었어.
결국 조교가 발로 차버리면서 김선호는 계집애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 날 막타워 훈련을 마치게 될 수 있었지.
저녁이 되자 한동철이 사병들을 집합시켰어.
그 날도 대검을 들고 말이야. 우리는 10분이 넘도록 얼차려를 받았어.
나와 김창식 병장, 최병희 병장은 우습게 끝낼 수 있는 정도였는데 김선호가 문제였어.
푸시업 10개도 제대로 못하는 거야. 한동철이 그랬지.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라고...
그런데 김선호가 그런거야.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한동철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신병이 하늘같은 고참한테, 그것도 제대를 몇 개월 남기지도 않은 병장한테, 그것도 정신병자 같은 한동철한테....
그런 말을 했으니 그걸 듣고 있던 우리 심정이 어땠겠냐?
한동철은 한 동안 할 말을 잃고는 김선호를 내려다 봤어.
한동철은 김선호의 머리를 대검으로 톡톡 치며 김선호를 일어나라고 명령했지. 그리고 벽에 기대고 세워져 있는 합판 앞에
서라는거야.
그 때 말렸어야 했어...흑흑.."
전상병은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
나는 말없이 측은한 표정으로 어린 아이처럼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는 전상병을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김선호는 병신같이 멀뚱멀뚱 서 있다가 몇 대 처맞고 그 앞에 선거야.
한동철은 김선호에게 눈감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지. 그런데 사람이 어디 그러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니까 김선호는 눈을 감은 척 하더니 실눈으로 한동철의 행동을 본 거야.
칼을 던지는 모습.....본능적으로 김선호는 몸을 돌리며 옆으로 수그렸어.
그런데 한동철의 손을 떠난 대검이 목표를 잃어버린 채 김선호의 왼쪽 어깨에 꽂혔버린거야.
난 처음으로 사람의 몸에서 심장박동에 맞춰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을 보았어. 동맥이 끊어진거야.
늦었지만....너무나도 늦었지만...그제서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한동철에게 달려 들었지."
전상병은 그 때 상황이 아직도 생생한지 깍지 낀 두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전상병에게 물었다.
"김선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어."
그랬다. 내가 근무지에서 전상병과 뒤엉킨 날 나는 김선호를 보았던 것이다. 갑자기 등골을 따라 한기가 내려앉았다.
"한동철은 군교도소에 수감됐어. 징역을 사는 기간이 몇 개월인지 몇 년인지 우리는 관심이 없었어.
우리가 제대하는 동안만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랬지.
남은 우리는 김선호가 죽던 그 현장에서의 기억 때문에 미칠 것 같았어.
한동철의 살인 행각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았지.
불면증은 물론이고, 우울증까지 걸릴 것 같았어.
어느 날 나는 휴가를 나와 부모님께 이러한 사실을 말했어.
그랬더니 아버지 말씀이 먼 친척 중에 보병부대 사단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거야.
나는 아버지께 사정했지. 그 분한테 말을 해서 제발 부대를 옮기게 해달라고.....
그리고 난 부대에 돌아왔어. 그런데 또 다른 이상한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거야."
"무슨 상황 말입니까?"
"김창식 병장이 이상해진거야. 고양이만 보면 죽여."
나는 갑자기 김병장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알 수없는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미친 것 같았어. 이유도 없이 그냥 고양이만 보면 죽이는거야.
그런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최병희 병장이 얘기를 해준거야.
만일 부사관들이나 간부들이 봤다면 당장 어느 정신병원에 수감시켰을거야. 이유를 물으면 그냥 고양이가 싫다는거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렇지가 않았어.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 그러나 김병장은 절대로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
얼마 뒤 여단본부에서 전출 명령이 떨어졌어.
아버지가 힘을 썼는지 나는 이 곳으로 전입오게 되었지.
천국 같았어. '같았어'가 아니라 그냥 천국이었어. 모든 것을 잊고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었어.
누구도 내 과거를 알 지 못한다는게 나는 너무나도 좋았어.
죽은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도 많이 수그러들었지.
며칠간은 잠도 잘 잘 수 있었고....
그런데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어.
원래 부대 입장에서는 김병장과 최병장이 남아 있는 것을 껄끄러워 했나봐.
그 둘을 함께 묶어 이 곳으로 보내버린거야. 두려웠지만 우린 서로를 무시했지.
그 어떤 합의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할거라는 걸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
그리고 실제로 편했어. 김병장이나 최병장이나 얼굴색이 변할 만큼 행복해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이 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신병이 한 명 들어왔어.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배치를 받은 나보다 고참인 신병.....정한수를 만나게 된거야.
죽었다는 무당의 아들.....
그를 만나면서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던 우리의 군대 생활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지."
-계속-
전상병은 잠시 마른 눈물을 닦아냈다.
"죽은 정한수가 했던 말....그 말을 난 김창식 병장과 최병희 병장한테 말하고 말았어."
"무..무슨 말 말입니까?"
"죽은 정한수가 그랬잖아. 땅구덩이에서 쏟아져 나온 귀신 중 하나가 김창식 병장한테 붙었다고....
부적 얘기부터 해서 정한수가 내게 했던 말을 낱낱히 털어놓았지.
그 말을 들은 김병장은 엄청나게 두려운 기색을 보였어. 그냥 실성한 놈이 허튼소리 했다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유독 김병장은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거야. 죽은 김선호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 보였어.
우리 모두가 잊고 싶었던 기억에서 김병장은 벗어나지 못했던거야
난 분명히 확신해. 정한수의 부적을 없애버린 사람은 김창식 병장이야.
그래서 정한수가 죽은 거고, 그 사실을 나차럼 짐작하고 있는 최병장은 그 뒤로 김병장을 엄청나게 갈구기 시작한거야."
어린 아이처럼 손톱을 깨물고 있는 전상병은?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5초소가 생기기 전....5초소 자리에 밤마다 누군가가 돌아다닌다는 사병들의 얘기 때문에 5초소를 만들었던 거야.
명목상은 민간인 출입이나 적의 침투 경로 차단이었지만 다 들 알고 있었어.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
다 들 죽은 정한수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수근거렸지.
그런데 근무를 서면서 니가 나한테 죽은 김선호 얘기를 한거야.
난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 잊고 싶었던 악몽같은 기억이 다시 나를 고문하기 시작했어.
최병희 병장한테 그 얘기를 했지만 최병장은 나를 미친 놈 취급했어.
이 부대에 죽은 김선호가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정말 심장이 터져나갈 듯 두려웠어.
왜 김병장이 정신병자처럼 고양이를 그렇게 죽이는지 그 심정이 이해되는 것 같았어."
"수사관이 그러던데 어젯밤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정말입니까? 실탄을 들고 갔던 기억이 전혀 없었습니까?"
"실탄은 내 의지로 챙긴거야. 두려움이 몰려와 어쩔 수가 없었어. 어둠이 깔린 풀숲에서 김선호를 볼 것 같았어.
아니...김선호의 혼령에 지배당한 누군가가 나를 해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실탄을 챙겼어. 쏠 생각도 없었고, 죽일 생각도 없었어. 단지, 장전된 그 총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어.
매복훈련이 계속되자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어. 그리고 그 다음 일이 기억에서 사라진거야. 귀신들린거야...분명히.."
전상병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너 정말 김선호를 어떻게 안거냐?"
전상병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표정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상병님 명찰에 적혀 있는 이름이 김선호였습니다."
"..........."
전상병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대에 김선호가 있어...김병장과 최병장이 위험해. 김선호가 그들한테 붙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김병장이 고양이를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도 고양이가 죽은 김선호를 불러내기라도 할까봐 두려운거야.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려고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행동인지도 몰라.
전에 니가 그랬잖아. 고양이가 아닌 사람이 귀신을 알아보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칼잡이 김병장이 누구에게 식칼을 던져버릴지 몰라.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돼. 그런데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전상병에게 나는 조심스레 작은 봉투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는 부적을 보여 주었다.
"아니!! 니...니가 그걸 어떻게?"
"죽은 정한수 엄마가 저에게 준겁니다. 귀신을 보여 줄거라고..."
"뭐? 뭐라구?"
"어젯밤 사고가 있기 전 귀신들을 보았습니다. 훈련 중인 부대원들 이상가는 많은 수의 귀신을 말입니다.
그리고 전상병님과 몸싸움을 할 때도 알 수 없는 낯선 기운을 느꼈구요.
무당이라는 정한수 엄마가 자신의 아들을 찾지 못하면 우리 부대원들이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한수라는 사람을 찾아 그를 위로하여 그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김선호는? 죽은 김선호는 어떡하고?"
"저는 그 사람 얼굴도 모릅니다."
"그냥 어떻게 해서든 찾아...."
잠시 후 수사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상병은 나에게 다가와 차가운 철창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니가 부대원들과 내 목숨을 살렸다. 나중에 사회에서 다시 만나거든 우리 꼭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자."
전상병은 마른 눈물자국 위로 또 다른 눈물을 쏟아냈다.
"그 때는 우리 과거를 잊고 정말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
"........"
나는 슬픔과 서러움에 일그러진 전상병의 얼굴을 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부대에 돌아온 나는 중대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간부들과 면담을 해야만 했다.
대량 살상 사고를 막은 공로로 대대장 표창과 함께 포상휴가가 있을거라는 얘기도 들려 주었다.
어쩌면 먼 친척뻘 되는 사단장의 지시였는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김창식 병장과 최병희 병장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단초?"
"네. 며칠만 단초를 서게 해주십시요."
"너 미친 것 아냐? 그건 안돼. 부대 인원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규정상 단초는 설 수가 없어."
근무자 배정을 담당하는 선임하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얘기를 받아들였다.
"며칠만입니다. 부탁입니다. 선임하사님."
"너 왜 단초근무를 서려고 하는데? 일병생활 하니까 힘드냐? 자살이라도 하려고? 전에 이 부대에 자살 사고가 있었다는 것
너도 알고 있지? 아니면 탈영이라도 할꺼냐?"
"자살을 할거면 뭐하러 단초 근무까지 요청을 하겠습니까? 산에 올라가서 그냥 목이라도 매달면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곧 포상휴가를 갈 사람이 탈영을 하기 위해 단초 근무를 요청합니까? 그냥 휴가 나가서 안들어오면 되지."
"아~~~ 이 새끼..특이한 놈이네. 딴 놈들은 무서워서라도 싫어할텐데...진짜 이유를 말해봐.
이유가 분명하면?허가해 주지."
선임하사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말하라니까...."
"...귀신을 만나야 합니다."
내 말에 선임하사는 멍하니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급스런(?) 단어를 사용하며 입을 열었다.
"아주 지랄염병을 하는구나."
"......."
"너 혹시 귀신 볼 줄 아냐?"
"네. 총기 사고가 있던 날도 훈련 중인 귀신들을 보았습니다."
선임하사는 놀란 듯 내 답변에 말을 잇지 못하였다.
"헌병대에서 전대웅 상병을 면담했는데 전상병도 자기가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사건이 또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선임하사의 눈빛은 내 말을 불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5초소가 생기기 전에도 많은 귀신 소동이 있었을 것이다.
설득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선임하사를 설득하기 위해 김선호와 정한수 얘기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귀신을 만나면 뭘 어떻게 할건데?"
"그들을 위로해서 저승으로 보내야 합니다.."
"헐...무슨 니가 법사냐? 퇴마사야?"
"저 아니었으면 전상병의 소총에 몇 명이 죽은 송장으로 변했을지 모릅니다. 선임하사님...며칠만 서겠습니다.
네? 제발 부탁입니다."
"헐..미치겠네. 좋아. 대신 실탄은 소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근무 시간과 근무 장소는 내가 정한다."
"안됩니다. 선임하사님."
"아~~ 신발 뭔 요구사항이 그렇게 많아? 부대에서 인기스타가 되었다고 아주 나를 개X으로 보는구나."
선임하사는 짜증스러운 듯 모자를 벗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실탄은 소지하지 않아도 되는데 근무지는 5초소, 시간은 자시로 해주십시오."
"자시?"
"밤 11시에서 새벽 1시 말입니다."
"이런럴, 이젠 법사나 퇴마사들이 쓰는 용어로 말하고 있네...근데 두 시간이나 서겠단 말야?"
"네. 어차피 제가 한 시간이라도 더 서면 근무자 돌리기가 더 수월하지 않습니까?"
"이런...내 걱정까지 해주고 있네. 알았어. 대신 딱 3일이다."
"사랑합니다. 선임하사님!!"
나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선임하사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손놔!! 자식아!!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당직 서는 날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다른 선임하사들이 당직 서는 3일간만
단초로 서는거다. 그리고 이 얘기는 너만 알고 있어야돼. 근무자들하고 교대할 때는 니 사수가 당직사관하고 같이 있다고 말해.
그리고 그럴리는 없겠지만 자살이나 탈영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그러면 난 X되는거야"
"네. 선임하사님!! 꼭 명심하겠습니다!!"
선임하사는 잠시 근무자 명단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그럼...오늘 내가 당직이니까 오늘밤부터 시작한다."
밤 10시 취침....잠이 오지 않았다. 어차피 11시부터 근무니 10시 반이면 일어나야 한다.
나는 침상에 바로 누운 채 주머니 속의 부적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3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겨낼 수 있을거란 다짐으로 나는 부적을 꼭 움켜쥐었다.
시간이 되었다.
나는 복장을 갖추고? 교대시간에 맞추어 근무지로 향하였다. 오늘따라 유달리 주변 경관이 음산하게 느껴졌다.
취사장 뒤로 돌아 어둠에 싸인 5초소로 가는 길....한기를 머금은 싸늘한 달빛만이 내가 걷는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직도 5초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산속 길을 백여미터나 더 걸어야 했다.
그 때 잔밥통 주변에 도달한 순간 내 눈에 둘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올가미에 뭐가 걸려들어 몸부림치며 켁켁대고 있는 것이다.
'불쌍한 고양이...내가 죽는다면 아마 난 고양이의 저주로 죽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어둠속의 요동치는 형체가 고양일거라고 믿으며 나는 가까이 그 곳에 접근했다.
김병장 몰래 고양이를 풀어 줄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근거없는 믿음은 곧 공포로 돌변하였다.
사람이었다. 아니...귀신이었다.
어젯밤 잔밥통 앞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던 그 병사였다.
그날 보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땀인지 피인지 모를 검은 액체가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목에 걸린 올가미를 움켜쥔 채, 잔밥통 주변에 떨어진 기름찌꺼기 위에서 연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켁켁!! 켁켁!!"
올가미의 압력에 검은 눈동자가 사라진 하얀 눈알이 곧 튀어나 올듯 부풀어 있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통스럽게 숨넘어가는 소리와 발버둥 소리를 외면한 채 그의 옆을 지나기 시작했다.?
"켁켁!!"
그러나 이내 나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켁켁..이봐...거기....켁켁..."
-계속-
나는 순간?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켁켁...이봐...거기..이것 좀 풀어줘...켁켁..."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거의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는 다급하게 한번 더 나를 불렀다.
"켁켁...어제 밥 먹고 있을 때..켁켁 나 봤잖아...."
그의 눈알은 거의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 무당 여자의 말과 지금 쓰러져가는 저 귀신병사에 대한 두려움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감긴 올가미를 풀어냈다.
"콜록! 콜록....아~~ 죽을뻔 했네. 어떤 자식이 여기다가 올가미를 쳐논거야?"
"......."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내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죽은 놈이 뭘 또 죽나?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주변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내 밥...내 밥 어딨지?"
주변을 더듬거리던 그 병사는 이내 자신의 반합통을 찾아내고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허겁지겁 밥인지 죽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입에 우겨넣었다.
"오랜만에 사람 보네."
"네?"
그는 허기가 가시지 않는지 바쁜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이봐요..."
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서는 정체모를 음식물의 국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러슈?"
"...나..난 사람이예요."
"뭐요? 누가 사람 아니랬소?"
그러더니 그는 다시 반합통 속의 음식물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 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그 자신의 정체를 말해주고 싶었다.
"다..당신은.."
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부대원 들이오."
그가 고개를 한 번 까딱이며 내 뒤에 시선을 맞추었다.
나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십수명의 병사들이 실루엣을 그리며 서 있었다.
"헉!!"
나는 순간 다리 근육에 힘이 풀려 이내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린 길을 잃었어."
숟가락질을 멈춘 병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답답한지 철모를 벗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드러난 그의 머리 측면에 구멍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것의 정체가 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구멍 속에서 쿨럭대듯이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얼마 동안 헤매고 있었는지 몰라.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론 기억이 안나......그냥 어둠만 있는거야.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우릴 깨워줬는데, 깨어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뭐가 이상했어."
그는 간지러운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이 없어졌어. 우리들만 빼 놓고 말야. 아무리 돌아다녀도...우리 밖에 없는거야.
우리가 상대하던 적들은 물론 주변에 민간인들도 없고, 들어오는 신병도 없고, 제대하는 사람도 없고, 휴가가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짐승들도 없었어. 새소리도 곤충소리도 고양이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두서너번의 숟가락질을 하였다.
"그리고...해가 뜨지 않아."
"예...예?"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지 않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해도 뜨지 않고 달도 뜨지 않아. 그냥 어둠만 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있고, 주변을 살필 수도 있었지.
단지 시간의 흐름만 느껴지지가 않았어. 시간이 흘러가는 건지 멈춰있는 건지 도대체 알수가 없더라니까.
그제가 어제같고, 어제가 그제같고, 오늘 한 일이 어제 했던 일 같고, 어제 했던 일들이 그제 했던 일 같고....
뒤죽박죽이야. 정리가 안돼."
그는 멍하니 어딘가를 주시하더니 기억 속의 뭔가를 계속 되뇌는 것 같았다.
"더 큰 문제는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거야. 어디론가 계속 전진하면 계속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는거야.
앞으로 가도 제자리, 뒤로 가도 제자리, 몇날 며칠을 걸어가도 제자리....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되고 있는 느낌...알아?
마치 우린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아. 이 곳을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십수명의 병사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누군가가 눈에 보여서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우리를 몰라보는 것 같았어.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사람을 좇아 다녀봤는데도 여전히 못알아 보더라구.
그런데 약간의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를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피해다니는 것 같았어.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데 이제서야 나를 알아보는 자네를 만난거라구.
어제도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갔지?"
"....예"
"자넨..어디서 온 거지?"
"예?"
"낯선 얼굴인데...."
나는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작 내가 반드시 만나야 될 그들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많은 수의 병사들을 본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묘안 하나를 떠올렸다.
이 방법이 통할지 안통할지는 몰랐지만 이미 내 입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다...당..당신들이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게요."
"뭐? 뭐라구?"
나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그 병사와 함께 맞은 편에 있던 병사들이 놀란 듯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순간 내 주책맞은 입이 무슨 짓을 한건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병사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슨 부탁?"
"정한수와 김선호라는 사람을 찾아줘요."
"뭐?"
"그 사람들을 찾아주면 당신들이 이 곳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가르쳐드릴게요."
"좋아...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일 이 시간쯤 제가 저기 있는 초소에 있을 겁니다. 거기로 데리고 오면 됩니다."
"뭐..그 정도야..오늘부터 다른 훈련거리가 생겼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 곳에 있는게 확실한가?"
"확실해요. 당신들이 돌아다니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 얼굴을 모르는데..."
"당신들처럼 군인이예요. 명찰을 보면 알 수 있을거예요."
"좋아 한번 찾아보지. 그럼 약속대로 우릴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는거지?"
"그...그렇다니까요."
대책도 없는 나의 약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걸까?
갑자기 나의 대답에 어둠속에 묻혀있던 병사들이 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그들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나는 곧 삭신이 저려오는 공포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 어둠 속의 실루엣이 나에게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비친 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병사는 한쪽 팔이 떨어져나가 없었고, 어떤 병사는 두 다리를 볼 수가 없었으며, 어떤 병사는 얼굴의 절반이 으깨져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어떤 병사는 찢어진 뱃가죽 밖으로 쏟아진 내장을 매달고 있었으며, 어떤 병사는 아예 하반신이 보이지 않은 채, 전선줄 같은
무언가를 길게 늘이고 있는 상반신만 공중에 띄워놓고 있었다.
누구 하나 몸이 성한 병사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극도로 혐오스럽고 구역질 나는 장면을 연출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들 중 얼굴의 반이 으깨져 사라져 버린 병사가 내 코 앞까지 다가오더니, 뭔가에 젖은 손을 내 왼쪽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그 흉측한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낮고 느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일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자신의 한쪽면 치아들이 모두 밖에 드러나 있음에도 그의 발음은 굵고 명확했다.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입속의 치아들은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계속 자잘한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네..네...아..알겠습니다."
나는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위속의 내용물을 간신히 틀어막으며,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겼다.
그는 나머지 얼굴 한쪽면에 힘겹게 붙어있는 반쪽의 입술을 늘이며 음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당의 경고도 무시한 채, 귀신과 대책없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야!! 이창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아~~ 이 새끼 진짜 못말리겠네."
선임하사였다.
"서..선임하사님이 여긴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야~~~ 이 미친놈아.. 근무는 안나가고 왜 짬밥통 옆에서 쳐자고 지랄이야!!"
선임하사의 말에 나는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병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내 품에는 올가미에 걸려 목에 상처를 입은 고양이 한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너 여기서 뒤집어져 자려고 근무 혼자 보내달라고 한거냐? 어쭈? 애완동물까지 만들어 두셨네."
"며..몇 시입니까 선임하시님."
"몇시? 근무시간이 5분이나 지났어 자식아!!"
"5분이요? 5분 밖에 안지났단 말입니까?"
"5분 밖에? 너 군대에서 5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몰라서 그래? 내가 순찰 안 돌았으면 해뜰 때까지 잘 놈이었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으깨진 듯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해? 자식아!! 니가 보고 싶어하던 귀신들 기다릴거 아냐? 빨리 근무지로 안 뛰어?"
"예. 선임하사님!!"
나는 품에 안은 고양이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근무지를 향해서 뛰었다.
나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 고양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참들의 질책을 먹은 나는 선임하사와 약속한 시나리오 대로 내 사수는 현재 선임하사와 같이 있다고 둘러댄 후
또 다른 어떤 공포가 몰려올 지 모르는 혼자만의 근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귀신들을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냥 꿈꾼게 아닐까?
나는 알 수없는 싸늘한 한기에 잠시 팔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왼쪽 어깨 위에 뭔가가 느껴졌다.
흙이었다.
아니...흙으로 그려진 사람 손자국...그리고 나의 뇌는 몇 분전 들었던 낮고 굵은 그 음성을 재생하고 있었다.
"만일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이런..시발..x됐다."
-계속-
그 날 야간 근무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 어둠의 병사들은 그들이 약속한대로 김선호와 정한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못찾아도 문제, 찾아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갈수록 김창식 병장의 표정이 수상해져 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취사일만을 하고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김병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
"김..김병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식재료를 칼질하고 있는 김병장이 알 수없는 말을 내뱉았다.
"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김병장은 계속해서 혼자 읊조렸다.
"김병장님...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김병장의 독백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천천히 칼질을 하고 있는 김병장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손을 가져다 대었다.
"김..김병장님.."
그러자 김병장님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호통을 쳤다.
"배식 준비 안하고 뭐해 임마!!"
"네..네...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김병장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전상병이 사고를 친 이후로 김병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 어둠의 병사들과 약속한 시간이 돌아왔다.
5초소 주변에는 싸늘한 한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충만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고, 내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아....신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초부터 그 무당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건 마찬가지인 상황이 돼버렸다.
싸늘한 한줌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산 중에 처박힌 공포의 5초소에 홀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깨닫게 되자 주변의 사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초소 옆 창에 비친 손모양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소리가 하이톤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게 공포로 돌변했다.
바람소리, 새소리, 나를 향애 손을 흔드는 나뭇잎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물줄기 소리....
어느 것 하나 공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앞에 비친 무언가는 조금 전의 그것들이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십수미터 앞 아카시 나무.....그 어둠속에서 판초우의를 쓰고 나를 지켜보던 병사가 있던 자리....
그 아카시 나무에 누군가 팔다리를 늘인 채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그를 조금씩 흔들리게 만들었다.
"헉..."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평소 찾지도 않던 그들을 불렀다.
"예수님..부처님..신령님...제발..."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자, 힘주어 닫혀있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는 발을 동동구르며 제발 내 눈앞의 그것이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귀신을 본 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던가...어젯밤의 꿈같은 경험이 모두 현실이었음을 나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 세상에 몸 성히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더욱 요절한 귀신들은 온전히 죽지는 않았을 터.....
나는 빨갛게 충혈됐을 눈을?천천히 떴다.
그러자 내 눈앞에 누군가가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죽은 정한수임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 나무에 매달린 형상이 그러한 힌트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오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무언가에 이끌리?듯 말없이 초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근무 중 초소를 이탈하지 말아야 함에도 지금 나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인도하는데로 천천히 그를 따라 나섰다.
어느 정도 발걸음이 계속되자 나는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취사장임을 알게 되었다.
"쿵....쿵....쿵"
어둠에 묻힌 취사장 안에서 누군가가 쪼그려앉아 바닥에 있는 뭔가를 계속해서 내려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만 보였지만 그 실루엣은 김병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섰다.
서서히 내 눈앞에 비쳐진 것은 산산조각난 고양이 사체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느리지만 반복해서 커다란 식칼로 그 사체를 조각내고 있었다.
"김..김 병장님...."
나의 부름에 김병장이 갑자기 칼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도..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니가 뭔데 여길 들어와!!!!!!!!"
갑자기 김병장의 미친 듯한 일갈과 함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빡!!!!"
식칼이었다.
번개처럼 식칼이 날아와 내 목의 오른편을 지나 식기보관함에 꽂혀버렸다.
나는 순간 얼음처럼 온 몸이 굳어버렸다.
김병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다른 식칼을 찾는게 분명했다.
정신이 든 나는 그제서야 내 오른쪽 목 부위의 작은 통증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손으로 그 곳을 만지자 손바닥이 흥건히 젖어옴을 느꼈다.
내 왼손을 확인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시발...피..."
내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즘, 식기함에서 시퍼런 날이 선 식칼을 꺼내 든 김병장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부반이 분명했다.
"다 죽여버려.."
모두 죽일? 생각이다. 그의 광기를 멈춰야 했다.
"철커덕!!"
나는 실탄을 장전했다.
아니...선임하사와 약속대로 나는 실탄을 빼고 근무를 서기로 했기 때문에 실탄을 장전하는 시늉만 냈다.
하필 이 순간에 빈 총이라니...
"김..김병장님...멈추지 않으면 쏠겁니다."
나의 말에 김병장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소름끼치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
죽을 것을 각오라도 한건지, 아니면 내 소총에는 실탄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아니면 내가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김병장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김병장의 부릅 뜬 눈보다 그가 들고 있는 시퍼런 식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진짜로 쏠 겁니다..."
그러나 나의 위협은 김병장에게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의 걸음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총을 힘껏 휘둘러 그의 손으로부터 식칼을 떨어뜨렸다.
칼을 들고 있던 손에 굉장한 고통이 있었을게 분명함에도 김병장은 개의치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김병장은 한 손으로 내 소총의 총구를 움켜쥐더니 다른 한손으로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켁켁...기..김병장님.."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듯 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김병장의 철근같은 근육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심장과 머리를 잇는 혈액의 이동 통로가 모두 차단된 것 같았다.
김병장의 체중과 힘이 벽에 눌려있는 내 목에 모두 전해지자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밤 올가미에 걸린 그 병사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한번도 나를 좌절시킨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김병장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부의 충격에 김병장은 잠시 뒤로 물러서며 상체를 숙였다.
나는 수십년간 묵혀왔던 기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 했다.
연신 천식 환자처럼 폐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몸을 추스른 김병장은 갑자기 나를 향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쿵!!"
내 몸이 벽에 충격을 가하자 나는 의식이 혼미해지면서?이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썩 꺼져버려!!!"
누군가가 호통을 치고 있다.
시야가 흐려져 김병장의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크게 놀랐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쓰러져 있는데 내가 아직 거기에 서 있다.
김병장은 여전히 벽을 등지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내가 김병장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여기는 우리 부대야!! 당장 꺼지지 못해!!!"
시야가 흐려진다. 힘겨운 탄식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힘들다....이젠 쉬고 싶다.
"이봐 친구, 괜찮은가"
누군가의 부름에 나는 눈을 떴다.
잔밥통에서 밥을 먹던 그 어둠의 병사였다.
그는 큰 대자로 누워있는 나의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반합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숟가락을 튕기며 나를 불렀다.
어둠은 가시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걸까?
"이봐, 친구...우리가 한 참을 찾아봤는데, 정한수라는 그 친구만 찾았어.
자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자네한테 가보라고 했는데....봤나?"
맞았다. 내가 본 것은 정한수였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오른쪽 목 부위의 통증이 느껴졌다.
"흐흐흐...다행이군. 약속을 다 지키진 못했지만, 자네도 이젠 우리에게 뭔가를 보답해 줘야지?"
그러나?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이제 우리에게 길을 알려달라고.."
나는 아무말 없이 그 병사의 말만 듣고 있었다.
그는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연신 입 주위의 분비물을 흘리며 게속해서 히죽거리며 나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다.
지난 밤 나를 위협했던?얼굴의 반쪽면이?으깨진 병사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굵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말 해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가 들고 있는 소총의 끝에 달린 시퍼런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공포감보다 절망감이 앞서왔다. 이젠 도망칠 힘도 없고, 저항할 힘도 없었다.
가위 눌린 사람처럼 신체 어느 부위하나 움직이지도 못 한 채, 나는 오로지 눈동자만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거라고 했을텐데...이제 말해..."
"죄송합니다. 큭큭...."
절망감과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나는 급기야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전히 몸은 마비가 일어난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이 으깨진 병사는 내 말을 듣자 내 몸을 가운데 두고 서서 소총의 대검을 내 목에 겨누었다.
"무슨 말이야?"
이 공포의 끝이 어떻게 될 지?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솔직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큭큭...거..거짓말을 했어요..."
그의 얼굴 한 쪽면에 드러나 있는 이빨들이 분에 겨운 듯 맞물려 갈리고 있었다.
-계속-
"거짓말...?"
그의 손떨림으로 인해 소총의 끝에 단단히 고정된 시퍼런 대검이 내 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느 새 내 주위로 수많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새끼...우리에게 거짓말을 해? 죽여버리겠어."
그 순간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병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나는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봐, 친구..자네..뭔가 알고 있지?"
"......"
숟가락 병사는 쪼그려 앉아 나에게 묻고 있었지만, 얼굴이 으깨진 병사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그렇지?"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요란스런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양 입가에서는 여전히 진득한 국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유언처럼 처절하고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네..."
잠시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그게 뭐지?"
"다...당신들은...."
나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죽었어요."
요란스럽던 그의 숟가락질이 멈추었다. 갑자기 지옥같은 적막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죽었어요. 죽은 귀신들이예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깨뜨렸다.
"뭐...뭐...이.신발 뭔 소리 하는거야?"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 붙였다.
"당신들은 죽은 줄도 모르고 이 곳을 떠돌고 있는겁니다. 전쟁은 끝났어요.....아주 오래 전에"
"우...우리가 주..죽었다구?
숟가락을 떨어뜨린 병사가 잠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피...피!!!"
내게 대검을 겨누던 병사도 자신의 허전한 한 쪽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여기 저기서 자신의 형체, 그리고 다른 이의 형체를 확인한 병사들의 절규가 지옥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비규환의 세상처럼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떤 병사는 분수처럼 피를 쏟는 팔이 사라진 자리를 틀어잡으며, 어떤 병사는 쏟아져 내린 자신의 내장을 쓸어담으며,
어떤 병사는 밑동이가 사라진 상체만 바닥에 대고는 두 손으로 연신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들의 몸부림은 불타오르는 지옥의 세상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낼 기세였다.
참혹한 비명소리와 절규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들의 처절하고 고통스런 몸부림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절규를 멈추게 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소리였다. 그리고 총소리, 대포소리......그리고 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이 주변을 덮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어느 조명보다 뚜렸한 영상으로 보였다.
전투 중이었다. 여기저기 포탄이 터지고, 수류탄 폭음이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장검의 소리처럼 공간을 뚫고 지나가는 총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함성소리, 울부짖음....비명소리. 이것만이 포화가 쏟아지는 그 전장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지옥같던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영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듯한 새벽 같았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여기 저기 작은 천막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간간히 초병만이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 초병은 잠시 배가 고픈지 자리에 앉아 반합통 속의 원가를 열심히 퍼올려 입에 우겨넣었다.
그 때였다.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콰콰쾅!!!"
천둥같은 폭음이 그 천막 위로 쏟아졌다. 여기저기에서 수 십여개의 불기둥들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불기둥 속에 정체를 알 수없는 덩어리들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소름끼치는 적막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듯한 병사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작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연못에 던져진 돌맹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목이 메이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도 있었다.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얼굴이 으깨진 병사가 잠시 울먹이는 듯 싶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으깨진 얼굴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많은 병사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리하고 약속을 한거지..."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려"
그는 천천히 소총을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그 대검을 날렸다.
"잠깐!!"
누군가가 그의 날아오는 소총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을 것 만 같았다.
"망자가 살아있는 이를 건드리면 안됩니다."
정한수였다.
"당신들이 아무 죄없는 이 사람을 죽인다면 영원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누가 더 많은 힘을 주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소총 끝의 대검이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우리를 내버려두지 그랬어..."
대검을 겨눈 그 병사의 반쪽 남은 눈빛은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요. 그렇다면 죽어서도 지켜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요?
집에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모두 알았잖아요."
정한수의 말에 그의 남은 반쪽 얼굴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소총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느 병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뜬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그들이 빛을 느끼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어.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환호성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눈부심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빛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너무나도 밝고 너무나고 맑은 빛이 너무나도 빠르게 떠올라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자 지옥 속의 악마같던 그들의 형상이 서서히 온전했던 이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자신과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엄청난 눈부심이 있음에도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빛을 즐기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던 정한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빛을 오래 전에 봤답니다. 단지 자신이 죽을 줄 몰랐거나 떠나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답했다.
"고..고맙습니다."
그는 잠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한수씨. 전할 말이 있어요."
"네?"
"어머니가....당신 어머니가 이승에서나마 부모 자식으로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말씀 전해달래요...."
나의 말에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아달랍니다...."
정한수는 이내 눈물을 떨구더니 얼굴로 시체처럼 힘없이 길게 늘어진 내 손을 꼭 쥐었다.
쏟아져 나올 피가 다 나온건지 이젠 오른쪽 목부위의 통증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정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이봐요. 정한수씨. 물어볼 게 있어요."
"뭔가요?"
"조금 전 당신이 쫓아냈던 그 사람...김병장한테서 쫓아냈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예요?"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예요. 명찰에 김선호라고 적혀 있었어요. 수시로 그 사람이 김병장의 몸에 들락거린 것 같아요."
"그...그랬었군요..."
"처음엔 이 부대를 저기 있는 군인들로부터 지키려고 했어요.
변변한 비석하나 없이 쓰레기 매몰하듯이 묻힌 자리에서 그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처음엔 가까이 가서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저는 피해만 다녔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단지 길을 잃은 것 뿐이었어요. 자신들이 죽은 줄 몰랐던거죠.
정작 김병장의 몸에 붙었던 사람은 다른 이었는데 저는 몰랐던거죠.
저 병사들이 나를 찾아서 말을 걸게끔 해주고, 그들의 정체를 일깨워준 사람은 당신이예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쓰러져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누워있는 김병장이?시야에 들어왔다.
"이제...김병장님은 괜찮은 건가요?"
"몰라요. 그런데 일단 그 혼령은 사라졌어요. 우리들과 함게 하려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의 말을 듣자 끝나지 않을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김병장님....."
나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김병장을 힘겹게 불렀다. 그리고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고..고양이를 왜 죽이는 겁니까?"
그가 듣고 있는 지의 여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절대로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의 김병장이 눈을 감은 채 죽어가는 작은 숨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가...."
"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김병장은 알 수없는 말을 뱉은 후 힘이 빠지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신발..이젠 허기가 가시네."
숟가락질에 목숨걸던 그 병사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핏줄기가 얼굴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의 본얼굴이 드러났다.
"아..아저씨..좀 웃기게 생기셨네요. 큭큭"
"뭐야? 하하하"
그리고 내게 대검을 겨누던 그 병사도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굵고 낮은 음성을 다시 한번 내게 들려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죽은 줄 알게 해주었으니..."
그의 온전한 외모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출중하고 번듯했다.
숟가락질 병사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부탁의 말을 건넸다.
"이봐 친구..자네가 지키지 못한 약속....다른 걸로 대체하면 안될까?"
"깨어났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광경이 이 곳이 의무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얘기를 나누던 군의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또 만나는구만. 이창훈 일병."
전상병과의 사건 때 나를 담당했던 군의관이었다.
"내가 이런데 다신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어지간히 부대에서 말썽장이인가 보군."
나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지난 밤 그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 깨어난거야. 자넨 정말로 운도 좋구만.
전에는 총을 맞고 살아나고, 지금은 칼을 맞고 살아나고..이건 뭐 터미네이터도 아니고..하여튼 자넨 불사신이야."
그제서야 나는 오른쪽 목부위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출혈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바로 저승으로 가는거였어... 통합병원으로 이송할까 했는데, 워낙 급해서 내가 바로 조치한거야."
"고...고맙습니다. 군의관님."
"조금 있다가 헌병대에서 수사관이 올거야. 니가 움직이기에는 불편한 것 같아서 내가 이리로 오라고 말해뒀어."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수사관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작은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번 사건 정리되면 전출 명령 떨어질 것 같다. 전대웅하고 김창식이는 형기 채워도 니네 부대로 다신 못돌아가."
난 그제서야 김병장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김..김창식 병장...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가해자 신분으로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어."
"몸은 괜찮습니까?"
"쨔식...니 걱정이나 해. 김창식은 괜찮아. 너희 두 놈 다 취사장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어.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고참들을 두 명이나 헌병대에 처넣어버렸으니.."
수사관은 잠시 사진이 박힌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놀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휴...김창식 이 미친 놈은 무슨 고양이를 그렇게 아작내 버린거냐? 이거 정신병 있는 것 맞지?"
"......"
"말해봐. 사건 당일 밤 취사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마냥 수사관의 진지한 눈빛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빼 놓은 채 나는 모든 것을 수사관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니가 김병장한테 고양이를 왜 죽이냐고 하니까 김병장이 너한테 칼을 던지며 덤볐단 말이지?
그리고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네..그렇습니다."
수사관은 볼펜을 이마에 몇 번 튕기더니 입을 열었다.
"니네 부대는 무슨 귀신 씌었냐? 아님 니가 귀신이냐? 애들이 왜 갑자기 니 앞에서만 미친 짓을 하는거냐?"
머릿속에서는 '네'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전대웅, 김창식....그리고 최병희...얘들 공수여단에서 사병생활하다가 전입한 병사들인데, 둘은 헌병대에 가 있고...."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던 수사관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더 조사해 볼건데, 너도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줘. 어차피 넌 헌병대에서 조사 끝날때까지 아무데도 못나가.
이번에 포상휴가 계획돼 있던데, 그것도 미뤄지는거다. 알겠냐?"
나는 묵언의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을 말없이 병실의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마치 긴 잠에 들어 꾸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오!!!!!!!! 이 쉽새!!"
병실에 울려퍼지는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깨웠다. 선임하사였다.
선임하사는 무슨 일을 내러 온 사람처럼 모자를 손에 움켜쥐고는 연신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같다. 지금 부대 난리났다. 시방새야."
선임하사의 속사포같은 투덜거림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 시방새..니 때문에 지금 헌병대, 기무대 총 출동해서 총기검열, 보안검열, 근무지검열, 구타검열..아주 생쑈를 하고 있다니까. 니 단초 세운거 걸리는 날에는 나도 불려가서 조카 욕처먹는거야. 징계받을지도 몰라 쨔샤!!
저번엔 총맞고, 지금은 칼맞고, 다음엔 수류탄이라도 까서 똥구녕에 처넣을래? 하여튼 그 때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큭큭..웃기지 마세요 선임하사님....목아파요..."
"아...이런럴. 니 뒤졌으면 나 영창가는거야."
"그래서 살아있잖아요."
"저 놈의 주둥아리는 살아가지고는....쯧쯧
그런데 김창식이 이 새끼는 고양이고 사람이고 왜 칼질을 해가지고는...그나저나 몸은 괜찮냐?"
"예. 근데 병문안 오신 겁니까?"
"내가 뭘 볼게 있다고 병문안을 오냐? 총들고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어!!"
"그런데 무슨 일로?"
"웬 아줌마가 니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
"예? 무슨 말... 말입니까?"
"아들을 봤으면 이제 부적을 태워버리란다.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거란다.
그러고보니까 니...그 아줌마 얘기 듣고 나한테 단초 세워달라고 한거였지?"
"반은 맞는 얘기입니다."
"뭐? 도대체 그 아줌마가 누군데?"
"주..죽은 정한수라는 사람의 어머니입니다. 무당입니다."
선임하사는 놀라는 듯 마지막 말을 간신히 내뱉았다.
"아....신발...그래서 니가 그 부적들고 귀신놀이 하러 간다고 한거구나. 소름끼친다. 더 이상 안 물어볼게."
하루가 더 지나서야 나는 의무대를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복장을 갖추고 있는 와중에 의무병이 몇가지 나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챙겨 준 작은 주머니 안에서 부적을 찾았다.
그리고 의무대가 조금 멀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준비한 라이터를 이용해서 그 부적에 불을 붙였다.
회색빛의 벗꽃잎이 날리 듯 작은 흔적들이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로부터 멀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등뒤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창훈 일병!! 빼놓은게 있네요."
소지품을 챙겨주던 의무병이었다.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무 낡고 헤진거라서 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가 건네 준 작은 수첩을 쥐어들었다.
그 안에는 알 수없는 이름과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어린 아이가 쓴 어지럽고 불규칙한 글씨 같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힘겹게 써 넣은 나의 필체였다.
그 필체와 함께 잠시 잊혀졌던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김우식, 경상북도 의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소. 우리 부모님하고 공부 잘하던 동생 우철이한테 안부 전해주소."
"내 이름은 최국봉이오. 전라남도 장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고요. 살아 계실랑가 모른디 우리 엄니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시오. 거시기..그 때 우리 집 소 도망간 게 아니라 제가 팔아 먹었다고 말이오."
"이름은 우기철, 충청북도 괴산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수. 우리 아들 진석이 잘 키워줬으리라 믿는다고 아내에게 전해주소."
"내 이름은 박정국입네다.? 평안북도 연변군 xx면 xx리 xx번지. 통일되면 꼭 찾아서 안부 전해주드라요. 우리 가족들 안내려왔으면 다들 북에 있음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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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명의 부탁이 빼곡히 적인 글을 천천히 읽어보며,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상당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느꼈다.
"끼이익!!"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자동차의 거친 제동소리가 내 앞에 멈춰섰다.
"부대 복귀하는가 보군"
헌병대 수사관이 지프차 조수석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다.
"네. 그렇습니다."
"차에 타. 안 그래도 니네 부대 가는 길인데."
내가 차에 올라타자 수사관은 내게 어떤 사실을 더 캐내고자 하는지 그간 조사한 몇 가지 사실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김창식, 이 자식?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당최 수사의 진전이 없다. 너 내일이라도 헌병대에 들러야겠다.
전대웅, 김창식, 최병희 모두 같은 부대에 있었더구만. 게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었구.
피살자가 김선호 아마 범인이 한동철이라고 했지?"
수 분동안 그의 말이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깊어지자 수사관은 점점 내가 알 지 못했던 사실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철이가 감옥에서 자살을 했더라는군."
"네? 자..자살 말입니까?"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교도소 안에서도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더라는거야.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간수들 판초우의를 뺏아 그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자기 어깨를 칼로 찌르는 시늉도 하더란 말이다.
게다가 벽이고 바닥이고 김선호라는 이름으로 도배를하고, 심지어 자기 옷과 명찰에도 김선호로 도배를 했다더군.
자해를 할까봐 교도소에서도 특별관리까지 했었는데 결국 교도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외부활동 시간에 간수들 몰래 자살을 한거야.
그런데 그냥 목매달아 죽을 것이지 김선호처럼 똑같이 어깨에 칼을 꽂아 죽었다는군. 벌 받은건지도 몰라. 죄짓고는 못살지."
수사관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 저 멀리 나의 부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감이 함께 몰려왔다.
"수..수사관님..자..잠깐 차 좀 세워주십시오."
"왜?"
"가..가슴이 답답해서 말입니다. 멀미가 몰려옵니다."
"이런...저 번에 생긴 총상 때문인가? 알았어. 야. 운전병 차 세워"
나는 잠시 차에서 내려 숨을 고르며 수사관에게 물었다.
"호..혹시...한동철이란 사람...고양이 알러지 있지 않았습니까?"
나의 물음에 수사관은 놀라는 듯이 답했다.
"헐..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 그 알러지 때문에 교도소를 지나다니던 고양이를 죽인 적도 있다더군."
힘없이 바닥에 누워서 내게 털어놓던 김병장의 말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그리고 초소에서 처음으로 전상병과 몸싸움을 할 때........어깨에 피를 흘리며 김선호라는 명찰을 달고 있던 그 병사....
"이럴 수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본 것은 김선호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김선호는 우리 부대에 없었다. 갑자기 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에엑!!"
"이봐..이창훈 너 괜찮아?"
토를 하는 와중에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읊조리던 김병장의 말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토악질 때문인지 공포심 때문이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부대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와서 나를 반겼다.
최병희 병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를 갖출 틈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았다.?
평소 미친개라 불리던 최병장이 알 수없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