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능이 끝났다.
내가 수능을 세번이나 보게 될 줄도 몰랐고, 결과가 이렇게 나오게 될 줄도 몰랐다. 목표로 하던 곳에는 갈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다시 한번 더 준비를 하던가, 복학을 하던가 할듯 하다.
지금은 다시 수능을 볼 마음이 없지만, 혹여나 나중에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부대에서 코로나로 인한 격리를 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4월 초 즈음부터 정말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는데, 시험 후 바로 복귀하여 격리실에 들어오니 기분이 이상하다.
정적. 고요하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들이 전부 하룻밤 꿈만 같을 정도로.
사실 이 기분은 처음이 아니다. 2018년 11월 첫 수능을 치르고 났을 때도, 재수를 한 뒤에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모든 기운을 끌어담아 준비해 오던 일상이 끝났으니. 이젠 그런 일상을 보낼 필요도 이유도 없고, 보낼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격리를 하면서 몇 개월 만에 드라마를 보는 중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3~4월 즈음에 시즌 1을 보고 늦게나마 정주행 중이다.
생각해보면 매 수능을 치고 바로 하는 일이 '드라마 보기' 인것 같다.
현역 때는 뷰티 인사이드를 본 것 같은데, 재수 때는 낭만닥터 김사부, 올해는 슬의를 보고 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저러고 있으면 무슨 기분일까' 이런 생각들이 샘솟는다.
아빠가 언젠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나는 어릴때부터 뭘 하고 싶으면 그걸 꼭 해내야 하는 타입이었다고.
아빠 말처럼 나에게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로망같은 게 있다. 막상 가지면 '내가 이것 때문에 그렇게 간절해했나??' 싶을 정도로 그것이 별 거 아닐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경험해보지 못해본 나로서는 막연한 욕구가 자꾸만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더 준비하면 되지 않나? 할 수도 있겠지만, 군대에 와서 똑같은 일과를 매일매일 반복하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같은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일을 잘 하게 되고, 보다 넓은 시야의 노련함이 생기지만, 감정이 무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훈련소에서의 기억과 신병으로 자대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들은 나에게 정말 선명히 남아 있다. 냄새, 습도, 온도, 누가 뭐를 했다 등 거의 모든 것들이 또렷하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에 대한 설레임 또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오래 지속되는 기억을 생성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특별한 경험들을 하루빨리 최대한 많이 해보고 싶다. 시간이 점점 갈수록 내가 주변 환경에 무뎌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년에 전역을 하게 되면 나는 23살이 된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겠지만 내 또래에 비해서 나는 경험이 적다 라는 것만은 알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특별한 경험들을 원하는 거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나의 미래를 위한 투자, 혹은 성취에 대한 욕구도 중요하겠지만 20대 초반을 공부와 군대에 전부 날려버리고 나중에 되돌아볼 추억을 많이 만들지 못하는 것은 또 아닌 듯 하다. 한번 더 준비를 한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세상에는 수능 말고도 의미있고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나는데, 나는 아직도 입시판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젠 좀 더 성숙해지고 싶다. 수능을 계속 보는 것이 미성숙한 상태라는걸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나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곳으로 향하고 싶다는 뜻이다.
일단 좀 쉬어야겠다. 아무 걱정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