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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홀트 레싱의 <<현자 나탄>> - 세개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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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8 19:01:35 (11년 전) / READ : 2408

유일신 운동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는 아시다시피 형제 자매의 종교다. 모두 이브라힘(아브라함)의 후손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이가 썩 좋지 않다. '유일신 종교는 편협해서 어쩔 수 없다. 다신교였으면 그렇게 안 하는데 그것 찬..' 이라는 상상력 돋는 이야기도 가끔 들리지만, 지구인은 어떤 종교나 이념도 싸움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레싱은 계몽주의 시대 독일의 아주아주 똑똑한 사람. 괴체라는 목사와 한바탕 논쟁을 벌이다가 기독교계의 압력으로 종교 문제에 대해 더 쓰지 못하게 되자, 대신 희곡을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참 잘났다.) 그 희곡이 바로 <<현자 나탄>>이다.

때는 바야흐로 12세기 말의 예루살렘. 살라딘과 십자군이 이 도시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이던 막간. 처형당하기만 기다리던 템플러(성전 기사단) 가운데 한 명이 뜬금없이 사면을 받는다. 그 기사는 어느 화재 현장에서 유대인 처녀 레하를 구출하고는 쿨하게 사라진다. 여주인공 레하는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배경상황이다. 마치 일일 연속극같다.

유대인 현자 나탄(주인공)이 등장하며 막이 오른다. 그는 부유하고도 현명한사람! 부러울 게 없어 보이지만 그의 이런 모습 뒤에는 '신은 그에게 이 세상의 온갖 보화 가운데 가장 천한 것과 가장 귀한 것을 듬뿍 주었다. 가장 천한 것은 부, 가장 귀한 것은 지혜 - 2막 2장' 이 숨어있었다. 부와 지혜를 얻게 된 과정에서 아픈 과거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탄은 딸 레하를 구해준 기사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그런데 기사는 기사대로 자리를 피하고 싶어한다.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기독교를 위해 죽고 죽이겠다던 템플러 기사가 무슬림 군주 살라딘의 호의로 제 목숨을 살리고, 자기 역시 유대인 처녀를 살렸으니까. 나탄은 혼란스러워 하는 기사에게 현명을 말을 들려준다.(현자니까) '우리 사이에 피부색이나 의복, 생김새의 차이는 있지요. 그런 차이는 대수로운 게 아닙니다. 서로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나무도 저 혼자 땅위에 우뚝 솟은 것처럼 뽐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나 저나 민족을 선택하진 않았어요. 우리가 우리 민족입니까? 민족이란 대체 뭡니까?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은 인간이기 이전에 기독교인이고 유대인인가요? 아! 인간인 것으로 족한 사람을 기사님 당신한테서 하나 더 발견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2막 5장'

우리 각자는 민족으로 갈리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인 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라는 레싱의 메시지는 묘한 감동이 있다. 한편,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던 살라딘은 결국 재정 위기를 맞고, 부자라고 소문난 나탄의 돈을 빌리고 싶어 하는데 그냥은 빌려주지 않을까봐 야릇한 작전을 하나 세운다. ' 내가 마침내 천한 물건 가운데 가장 천한 것(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런 잔꾀까지 쓰게 되었단 말인가!' 라면서.

그 작전이란 나탄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대답을 유도한 후 버럭 화를 내면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이다.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가운데 어떤 종교, 어떤 율법이 가장 마음에 드나?' 나탄은 잠시 고민하더니 엉뚱하게도 옛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반지의 비유'이다.

'그런데 폐하, 제 생각을 말씀 드리기 전에 짤막한 이야기 하나 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옛날 옛적 한 옛날 동방의 어느 나라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석은 오팔로 온갖 영롱한 광채를 발했습니다. 그리고 신통력을 지녀 그걸 믿고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은 신과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되었지요. 그 반지는 아들에서 아들로 전해오다가 마침내 아들 셋을 둔 아버지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세 아들 모두에게 반지를 물려준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말만 믿고 있을 세 아들 가운데 둘을 실망시키는 일이 아버지를 괴롭히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은밀히 세공사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반지를 본떠 두 개를 더 만들게 합니다.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말고 모조품을 진품과 똑같이, 완벽하게 만들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세공사가 반지 세 개를 가져왔을 때 아버지조차 자신의 진짜 반지를 가려내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기쁘고 만족해서 세 아들을 하나씩 따로 불러 축복과 함께 반지를 줍니다.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아들들은 진짜 반지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 가지 종교 가운데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거의 다름 없습니다.'
'오.. 신이시여!'

사실 이 반지 이야기는 레싱의 창작은 아니다. <<데카메론>>에도 들어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레싱은 다음과 같은 결말을 덧붙인다. ' 세 아들은 서로 고소했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 반지는 사랑받게 하는 신통력을 가진다고 들었다. 음, 그렇다면 너희 반지는 셋 다 모두 진짜가 아니다. 진짜 반지는 아마 없어진 모양이다. 너희는 누구를 사랑하느냐? 각자 자기 자신만을 가장 사랑한단 말이냐? 내 충고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너희 삼 형제를 똑같이 사랑했다. 그러니 각자 아버지의 편견 없는 사랑을 본받도록 노력하라.'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짜 반지, 즉 참된 믿음이 아니다. 라는 것이 레싱의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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