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번역<섬광閃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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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
2018-07-31 14:40:51 (8년 전) / READ : 390
섬광閃光
눈을 감고 잠이 들면 가게 되던 의식 너머의 어딘가에서 순수한 정신은 밑바닥을 훤히 드러내는 강처럼 흘러가고 있었고, 이제는 자신을 볼 수 없는 눈은 보이지 않는 자신이 이끄는 자연스레 벌어지는 일들을 쫓아 그가 있는 어느 곳에서 멀리 떨어진 희미한 능선 뒤로 피어나고 있는 거대한 불꽃의 끝자락에서 멈추었다. 장엄한 불길은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높게 떴다가 말려들어가며 해안을 덮치는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넋 놓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 있던 목소리가 물었다.[저게 뭐지?]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는 잠시의 침묵 뒤에 짧게 대답했다.[저건 불길이야. 불길이 번지고 있어]하지만 그러한 대답에도 걱정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저 탄내라고는 나지 않으며 연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불보라가 쏟아내는 화광과 그 빛에 물들여진 세상의 색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세상은 계속해서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여가며 주황빛으로 번져갔고 이윽고 절정에 이르며 모든 것을 덮어 보이려 그 기세를 뻗치는 순간, 갑자기 세계의 장막은 옅어지고 순식간에 장막을 꿰뚫는 현실의 의식이 물감을 풀 듯 세계와 함께 섞여가며 사라져 버리더니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을 찢어 놓았다. 그 속도는 반쯤 잠긴 눈과 반대로 나머지가 허상의 존재를 구별 해내기 위해 눈동자를 구르기 시작한 것보다 빨랐고, 본능적으로 무의식속 기억을 가두어 놓으려 하는 두뇌의 회로보다도 빨랐다. 미지의 섬광과 함께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수면의 욕구로 취해 있는 몸뚱이는 그대로 둔 상태로 일각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꺼풀이 스스로 두 눈을 열어젖히자 깜빡이는 동공에는 알 수없는 아련함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는 오래전 보았던 단편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게 퍼져버린 짧은 기억의 안개를 뒤로하고 자신의 눈앞의 펼쳐진 시야에 주목했다. 텅 빈 방안의 진갈색 마룻바닥에는 알 수 없는, 옅지만 매력적인 자줏빛이 번져 있었고, 그 위로 창틀에 가려진 그림자가 빛의 방향에 따라 왜곡되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자동적으로 등을 지고 있던 창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늘 눈을 뜨면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해보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며, 찰나에 자신을 홀린 농염한 자줏빛의 근원이 창밖에서 창을 투과한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밖은 도시의 작음 소음마저 없이 조용했다. 그는 울긋불긋 제각기 모양을 가진 여러 채의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뒤로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 완만한 굴곡으로 이루어진 산의 윤곽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압도적인 광경에 숨이 멎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동공에는 언제가 잃어버려 그 존재를 잊고 있었던 소중한 존재를 다시 볼 때처럼의 반가움과, 전혀 예상치 못하며 보는 즉시 압도 되어 버리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산 위로는 하늘이 불타고 있었다. 태양은 아직 산 아래에 머물러 있었지만 어느 정오의 태양보다 거세게 타오르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듯 했다. 하늘의 중심에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의 가장 강렬하고 응축된 노란빛이 서려 있었고 서서히 주황빛에서 붉은 빛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으며, 빛을 피해 숨은 자줏빛 구름의 그림자들이 널찍이 퍼져 있었으며, 빛은 번짐의 한계선에 다다를수록,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하늘의 색도 파스텔 톤의 보랏빛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움직이는 그림과 같이 예술에 가까운 자연의 진품이었고 어떠한 화가도 그 모습에 눈을 때지 못하여 흉내를 내보려 붓을 들 때쯤이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여 화폭에 담아야 할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붉게 물들어 가는 세상을 그윽이 바라보며 황홀함에 젖어 있었다. 그러자 흐려져만 가던 무의식속 흩어졌던 파편들이 다시금 모여 생생하고 또렷이 보이는 한 장면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는 그것이 환상 속에서 못다 한 형연할 수 없는 극도의 타오르는 빛의 향연을, 아니 그보다 더한 절정의 끝을 지금 살아있는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저 너머의 환상의 연장선이자 그것을 뛰어넘어버린 현실의 극치에 심취해 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러니하게도 잊고 있었던 기억의 끝자리에 서 있던 목소리의 빈자리가 고독과 함께 오히려 그를 휘감았고, 눈앞의 영롱한 빛깔들과 달리 자신은 그 색과 대비되어 너무도 어둡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물음을 던졌던 것은 누구였을까. 그는 모호함과 알 수 없는 빈자리에 대한 상념과, 따라오는 외로움이라는 사실적 감정에 곧 모든 것의 흥미를 잃었고, 고결한 자연의 배경을 바라보던 시선과 아직도 그의 눈썹에 감돌고 있는 여운을 섭섭히 거둬들였다. 그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고정한 뒤 창밖을 등지고 전처럼 돌아누웠다. 그리곤 잠을 청하려 다시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는 서서히 잠에 들며 생각했다. 결국 다시 잠들게 되고, 다시 깨어나게 되면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지나가버린 또 하나의 꿈과 같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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