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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7066 멸망을 피할 방법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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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4-02-05 06:58:20 / READ : 1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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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이 '1'이라 된 건 뭡니까?"

 "우리 우주의 부피입니다."

 "부피? 그럼 그 옆에 있는 건..."

 "시뮬레이션 우주의 부피입니다. 지금은 대략 0.8이군요."

대통령은 이해를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어. 하지만 망신당하기 싫어하는 속물답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구소장은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어.

 "제가 부피라고 말씀드렸지만, 정말로 우리 우주의 부피가 1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상대적인 척도를 나타낸 것이지요. 우리 우주가 1이라고 가정했을 때 시뮬레이션 된 세계는 얼마나 큰지 알아보기 위해 있는 값입니다. 이제... 시뮬레이션의 부피가 0.9를 달성했으니, 우리 우주보다 대략 10퍼센트 작다고 할 수 있겠군요. 둘 다 1이 되면 시나리오를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되는 겁니다."

대통령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어. 난 박사님의 인내력에 깜짝 놀랐어. 멍청이들을 절대 참아내지 못하는 인간인데 그래도 대통령에게는 예의를 지킬 건가봐.

 "각하, 이제 시작됩니다. 여기 이 작은 점이 시뮬레이션 된 우리 은하입니다. 이 안에 지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는... 아직 중생대가 끝난 지 얼마 안됐군요. 조금 연산 속도를 높이면... 마이오세를 지나서, 이제 플라이스토세에 진입합니다. 원시 인류가 등장했을 겁니다. 아, 이제 됐습니다."

연구소장은 감속 버튼을 여러 번 눌렀어. 초당 수백만년씩 흘러가던 시뮬레이션 속 시간이 점점 느려졌어.

 "방금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제 곧 인류가 20세기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보실 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별들로 가득 찬 우주를 보여주던 홀로그램은 꺼졌어. 조금 전까지 넓은 방을 메우고 있던 디스크 돌아가는 소리도 일시에 멈췄어.

 "뭡니까?"

 "종말입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일그러졌어.

 "아니,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해놓고는, 대뜸 종말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주가 소멸한 겁니다. 보십시오."

연구소장이 가리키는 건 시뮬레이션 우주의 부피를 뜻하는 디지털 숫자였어. 조금 전까지 '1'이었던 것이 어느새 '0.000...1'로 곤두박질 쳐있었어. 그리고 잠시 뒤 긴 소수점 자리가 모두 사라지고 숫자는 깔끔한 0이 되었어.

 "허, 나 원, 이해를 못하겠군."

멍청한 대통령은 경악하는 대신 짜증을 냈어.

 "그 전에 이게 대체 다 뭡니까? 뭔, 무슨... 시뮤, 시뮬레이션이라고 했습니까?"

 "'예측 엔진'입니다."

대통령은 옆에 있던 과학기술부장관에게 시선을 돌렸어. 장관은 넉살 좋게 웃으며 연구소장이 설명할 것이라고 공을 넘겼어. 연구소장은 불안한 와중에도 웃으며 과학에 문외한인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을 시작했어.

 "말 그대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입니다."

 "미래를 예측한단 말입니까?"

 "예, 지난 2022년에 시작된 국가기간프로그램입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정확히 재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잠재적인 미래까지도 예측해낼 수 있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기기..."

 "잠깐만요. 말하는 중에 미안한데, 2022년이면... 벌써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선인 시절에도, 당장 어제도, 이런 게 있다는 걸 한 번도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전부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은 급히 아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대통령은 다시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는 선심쓰듯이 말했어.

 "말해보세요."

연구소장은 땀을 닦으며 내게 손짓했어. 난 재빨리 들고 있던 파일을 넘겼어.

 "사실, 예측 엔진은 완성된지 얼마 안됐, 아니, 사실 그 전부터 있긴 했지만, 지금의 가장 완벽한 형태인 '카산드라-피티아' 버전을 완성한지는 얼마 안됐습니다.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도록 여러 모델을 갈고닦는데 수십년이 걸렸죠."

 "그래서 하고자하는 말이 뭡니까?"

 "8년 전에 처음 가동을 시작한 뒤로 저희 연구팀이 약 이백삼십만회 미래를 시뮬레이션했는데 말입니다..."

연구소장이 말을 멈췄어.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어.

 "가동했는데?"

대통령이 채근하고서야 연구소장은 말을 이었어.

 "그 중 16회를 제외한 모든 시뮬레이션에서 우주가 곧 멸망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주가 멸망해요? 언제?"

 "언제라도 멸망할 수 있습니다. 올해 12월 9일과 내후년 5월 16일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우주는 반드시 멸망합니다."

대통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어.

 "허, 내가 진짜 살다살다 별... 이거 제대로 작동하긴 하는 겁니까?"

옆에 있던 과학기술부장관이 대통령의 귓가에 속삭였어.

 "국방부에서 사용하는 전략전술지휘통제 프로그램이 저 예측 엔진의 베타 버전입니다. 지금 저 물건은 국방부 것보다 최소 15만배 더 뛰어난 연산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5만배?"

대통령과 과학기술부장관은 국방부에 예측 엔진의 열화판을 제공한 것을 두고 한바탕 설전을 벌였어. 한시가 급하다는 연구소장의 만류에 둘은 겨우 진정했지.

 "각하, 어떤 고등문명도 해결하지 못한 종말의 위기가 지금 우리 세계를 향해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종말이 대체 뭐 때문이라는 겁니까? 원인을 찾아서 조치를 취하세요."

 "저희도 모릅니다."

 "모른다니. 저, 예측... 기계가 알려줄 것 아닙니까?"

 "예측 엔진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입니다."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들리는 지는 압니까? 대체 무슨 한계가 있다는 겁니까? 아니, 멸망한다면서요? 그럼 뭐 때문에 멸망하는지 정도는 당연히 알 것 아닙니까?"

 "그게 핵심입니다. 이 멸망은 형태가 없습니다. 전조도 없습니다. 그저 갑자기 찾아와 우주를 한 순간에 끝장냅니다."

 "그러니까 그 멸망이 뭐냐는 말입니다!"

 "뭔지 모른다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주먹다짐을 할 뻔한 두 사람을 옆에 있던 장관과 경호원들이 말려서 겨우 떼어놓았어. 과열된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서야 연구소장은 다시 대통령에게 설명을 시작할 수 있었어.

 "예측 엔진은 우주 그 자체를 재연합니다. 수경수조 개의 세계를 만들어낸 다음, 우주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철저하게 우리 세계와 동일하게 흘러간 모델을 하나 골라서 미래 또한 시뮬레이션합니다. 이를 통해 향후 시행될 정책의 효과와 부작용 등을 알아내고, 미리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만한 부분을 제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장이나 거짓말이 아니라, 지금 이걸로 진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겁니까?"

 "예, 각하. 바로 그겁니다."

 "그럼... 우리 당 다음 총선 결과도..."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세상이 사라질 판인데 그깟 정치가 대수입니까!"

대통령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어. 하지만 더이상 유치하게 징징거리진 않았어.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지금까지 들은 걸 정리해보건데, 일단 이건 미래를 보는 기구에요. 그렇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당신네들이 우주가 멸망한다는 걸 알아냈어. 그런데 그 멸망이 뭔지는 아직 모른다 이거지?"

 "예, 그렇습니다."

 "멸망하는 것 자체는 틀림없고?"

 "틀림없습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지?"

 "조금 전에 보셨잖습니까."

연구소장이 다시 한 번 시뮬레이션 우주의 크기가 적힌 디지털 스크린을 가리켰어. 여전히 '0'이란 숫자는 변하지 않은 채였어.

 "한 번 봤으니까, 다시 보죠. 다시 가동시켜보세요."

 "가동 중입니다, 각하."

 "뭐라고요?"

 "각하, 아까부터 예측 엔진은 계속 가동 중이었습니다. 저희가 인위적으로 멈춘 게 아닙니다."

 "지금 이 홀로그램 꺼진 거 아니에요? 빛이 없는데."

 "우주가 소멸하고 난 뒤의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화난 열대문어처럼 알록달록 해지기 전에 연구소장이 재빨리 덧붙였어.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이 프로그램을 이백삼십만번 이상 가동했습니다. 문제는 서기 2100년대의 미래를 보려고 해도, 항상 우주가 21세기 후반에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절대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기계에 뭔가 이상이..."

 "'우리 우주'만 멸망합니다, 각하. 시뮬레이션에 일부러 변수를 부여해서 우리 우주와 다른 역사로 흘러가도록 하면 서기 1만년대, 2만년대는 물론 10억년 후까지도 계속 이어집니다. 예측 엔진에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대통령은 생각이 많아졌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어.

 "지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겠으니까, 이제 내가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예, 각하."

 "이 종말에 형태가 없다고 했는데, 그럼 우리가 갑자기 전부 사라지기라도 합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주가 한 순간에 극히 일부만 남기고 소멸한 다음, 남아있던 부분도 곧 사라집니다."

 "이 예측 엔진으로 최소한... 그러니까, 올해부터 내후년 중에 정확히 언제 우리 우주가 끝나는지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 멸망은 전부 올해에 몰려있었습니다."

 "올해라... 지금 당장 세상이 끝장나든가, 그게 아니어도 내 재임기간 안에 끝난다는 거네."

 "슬프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전부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이 멸망이 프로그램의 이상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을..."

 "각하, 예측 엔진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데 이미 지난 8년의 세월이 소모되었습니다. 우주는 올해, 아니면 내년, 혹은 내후년에 멸망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고, 이는 피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

대통령은 몇 분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 짧은 시간동안 그의 주름살 자글한 돼지 같은 얼굴에서는 온갖 감정이 스쳐지나갔어.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대통령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착 가라앉아있었어.

 "그래도 우리 과학자들이 여기까지 알아냈으면 더 노력을 해봐야하는 것 아닙니까? 이... 멸망의 순간을 어떻게든 그, 뭐냐, 관측을 해서...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아낼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요?"

 "지난 8년간의 시뮬레이션으로 알아낸 바, 이 멸망의 원인이 인간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구요?"

대통령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어.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갑자기 찾아오는 멸망이라더니, 원인이 인간이면 우리가 어떻게든, 뭐, 그 뭐야, 우리가 지연시키든, 예방하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어떤 행위가 멸망을 불러오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대체 왜요? 이걸로 뭐 정책을 진행했을 때 어떤 효과가 나오고 어떤 부작용이 나오는지도 다 안다면서. 아니, 쓰라고 있는 물건을 왜 안씁니까?"

 "각하,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연구소장은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어. 이젠 이 오만한 과학자가 안쓰러울 지경이었어.

 "정책 시행의 결과나 부작용 정도는 작금 우리나라의 사회를 재현한 작은 시뮬레이션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말하고 있는 이 멸망은 우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사건입니다.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 하세요! 그리고 인간들이 뭔 짓을 벌이기에 우주가 멸망하는지 알아내면 되잖습니까."

 "그렇게 되면... 전체 시뮬레이션 규모에 비해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너무나 작은지라, 관측하려고 하면 관찰자 효과가 발생합니다."

 "하, 씨... 이건 또 뭔...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보세요."

 "우주 전체 규모의 시뮬레이션이 작동하는 도중에 인간 사회를 면밀히 관찰하면, 시뮬레이션 내부의 존재들이 자기네가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뭔... 이 무슨..."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 할 경우, 그 시뮬레이션 속 지구는 우리 세계의 미립자 같은 아주 하찮고 작은 존재입니다. 시뮬레이션 관찰자가 아무리 자기 존재를 지우려고 애써도, 미립자는 자기보다 훨씬 큰 존재를 알아채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관찰자의 존재를 숨기세요."

 "불가능합니다. 여태까지 저희가 알아낸 것은, 시뮬레이션 속 인류가 21세기 초반부터 관찰자를 감지하는 기술을 개발해낸다는 것과, 감지를 피하려면 관찰을 줄이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관찰자를 감지한 인류는 원래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우주의 멸망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류가 패닉에 빠져 멸망하죠."

 "그럼..."

 "우주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인류를 근접하여 관찰하면서 동시에 역사를 바꾸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대통령은 담배를 가져오게 했어. 몇 분만에 몇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그가 다시 물었어.

 "다시... 다시 정리해봅시다. 그... 우주 전체의 크기에 비해 지구가 너무 작다보니까, 이... 시뮬레이션 되는 가상의 인류가 자기보다 훨씬 큰 존재인 관찰자를 알아채는 게 문제라는 것 아닙니까? 그럼 지구가 너무 작은 존재가 되지 않도록 태양계만, 아니 지구만 시뮬레이션 해보세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우주의 멸망이라는 건 우주적 사건입니다.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 했을 때만 알아낼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제한된 시뮬레이션을 한다고 쳐도, 범위가 축소되었으니 시뮬레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나리오가 크게 어긋나서 역사가 원래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거죠."

 "아니, 거, 참!"

 "쉽게 말씀드리자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시뮬레이션 하는데 동아시아만 범위로 삼았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고대부터 고려사까지는 얼추 비슷하게 흘러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럽이 없으니,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 일본에 조총을 전수해줘야 할 포르투갈도 없고, 조총이 없으니 임진왜란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가면 영국이 없어서 아편전쟁도 일어나지 않죠. 21세기가 다 지나도록 청나라 중심의 중화문명이 깨지지 않는 겁니다. 그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질 일도 없지요."

 "..."

 "인류가 직면한 우주의 멸망이라는 사건은 히로시마입니다. 유럽과 미국이 없는 시뮬레이션에서 핵폭탄이 존재하지 않듯이, 지구만 있는 시뮬레이션에서도 우주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

 "지구 전체를 범위로 잡아야 우리 역사를 제대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것이죠."

 "이보세요. 내가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태양계, 아니 은하계 정도만 범위로 잡아보란 말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반드시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 해야 지구에서 생명체가 생겨나고, 그 생명체가 인류로 진화합니다. 우리가 관측하지 못한 우주의 단 0.01퍼센트만 잘라내도 시뮬레이션은 극적으로 원점을 이탈합니다."

 "제기랄!"

대통령이 분통을 터뜨렸어.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그냥 우리가 전부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알고 있어라 그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뭐? 어디 해결책이라도 있어요?"

 "해결책은 아니지만... 미봉책은 있습니다."

 "미봉책?"

담배를 쥐고 있던 주름진 손이 덜덜 떨렸어. 신경질적으로 재떨이를 닦달한 대통령이 눈을 반짝였어.

 "뭡니까, 그게?"

 "이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과학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죠."

 "아니, 내후년 안에 멸망한다면서!"

 "그러니 시간을 늦춰야지요."

 "뭐?"

여기서 내가 나설 차례였어. 난 주머니에 있던 데이터픽을 메인컴퓨터에 가져다댔어. 연구소장은 자신의 야심찬 계획이 홀로그램으로 구현되어 방 안에 들어차는 것을 황홀한 표정으로 지켜봤어.

 "이번 건 또 뭡니까?"

 "'노아의 방주' 계획입니다."

대통령은 알아듣지 못할 답을 얻기 위해 질문하는 대신 연구소장이 계속 떠들도록 내버려뒀어.

 "쉽게 말해서, 일정 공간을 제외하고 우주의 시간을 잠시 멈추는 겁니다. 시간이 멈춘 동안 우리는 계속 연구를 거듭해서 멸망을 피할 방도를 구할 겁니다."

 "시간... 시간을 멈춰?"

 "예,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게 가능이나 합니까? 아니, 가능하다쳐도, 일정 공간을 제외한다니. 뭐, 어디는 시간이 흐르게 하고, 어디는 멈추게 하고, 그런 거에요?"

 "예, 그렇습니다."

 "허, 참. 내가 오늘 해괴한 소리를 참 많이 듣습니다."

 "가능합니다. 설비도 모두 갖추어 놓은 상태입니다."

 "허허."

대통령은 헛웃음을 쳤어.

 "시간을 멈춘다라... 그럼 시간이 계속 흐르게 할 곳은 어디입니까?"

 "여기, 장영실연구센터 본동입니다."

 "여기만 멀쩡히 냅두고 다른 곳은 전부 시간을 멈춘다?"

 "예, 그렇습니다."

대통령의 입에서 거듭 실없는 웃음이 샜어. 그는 점점 미쳐가는 자신과 싸우는 사람 같았어.

 "그래서 오늘 날 불렀구만. 그 말을 하려고 불렀어."

 "아닙니다. 그걸 말씀드리려고 대통령님의 귀한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요?"

 "오늘 당장 노아의 방주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모셔온 겁니다."

 "..."

 "제가 곧 이 버튼을 누르면..."

연구소장이 메인컴퓨터 제어부에서 유달리 돌출된 소켓에 손을 올렸어.

 "연구센터 본동과 외부의 공간이 분리됩니다. 그리고 외부의 시간은 멈춥니다."

대통령은 연구소장을 무표정하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게 하세요."

 "..."

 "수십년동안 대통령들한테도 아무 말 안하고 준비해온 계획인데 그걸 고작 내가 반대한다고 실행 안하겠습니까? 어디 한번 해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지나 봅시다."

연구소장은 짤막하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시간을 멈추는 버튼을 눌렀어. 아주 잠깐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어. 그러나 잠시 뒤 창문 밖이 까매졌어. 이어서 실내의 조명이 모두 꺼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어.

 "걱정마십시오. 건물의 전력이 자체 전원으로 대체되는 중입니다."

조금 뒤 조명이 다시 켜졌을 때, 사람들은 창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도시 리모델링으로 넓게 조성된 서울의 중앙광장도, 경복궁도, 그 높던 다른 빌딩들도 모두 보이지 않았어. 그저 칠흑뿐.

 "된 겁니까?"

 "예, 그런데..."

 "원래 시간이 멈춘 곳은 저렇게 밤처럼 까맣게 변합니까?"

 "..."

연구소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검은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어. 저 멍청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뇌에 든 것 없는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었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한 사람은 나뿐이었어. 여태까지 가설을 가지고 있던 건 나뿐이었고. 그런데 내 가설이 들어맞아버린 거야.

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어.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어. 멍청한 결정의 비극적인 결과가 이렇게 웃길 수 있다니! 이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생각하니 아찔하면서도, 주위의 어리둥절한 얼간이들을 보니까 안 웃고 배길 수가 없었어.

물에 솜사탕 씻는 너구리 같은 놈들이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는 엘리트 행세를 하는 꼴이란!

 "거, 뭔데? 지금 이게 다 뭔지, 좀 아는 거라도 있습니까?"

제일 먼저 이 상황을 받아들인 건 대통령이었어. 아마 가장 멍청하기에 자기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하는 속도도 가장 느렸겠지. 다른 사람들은 슬슬 진실을 조금씩 눈치채고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거든.

난 마지막 자비를 베풀기 시작했어. 우주의 멸망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설명해주는 것 말이야.

 "시간을 멈춘다니. 정말 그게 가능할 줄 알았던 거에요?"

내 목소리는 놀랍도록 쾌활했어.

 "세상에 시간을 멈춘다니! 하하!"

 "이봐요. 뭔지 설명부터 하고..."

 "시간은 애초에 흐른 적도 없어!"

그제야 모두의 눈에 온연한 이해가 깃들면서 공포가 얼굴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인간의 비유에 불과한 거야! 시간은 애초에 흐를 수 있는 게 아니야! 시간은 그저 우주를 지탱하는 여러 축 중 하나라고! 우리가 공간을 활용하는 것처럼 시간을 자유자재로 쏘다닐 수 없다고 해서 그게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인 건 아니지!"

방 안에 있던 누군가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어. 대번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어.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다들 어디론가 전화하기 시작했어.

난 말을 이었어.

 "너흰 바깥의 시간을 멈춘 게 아니라, 그냥 세상으로부터 시간을 떼어내버린 거야. 공간과 시간, 우주를 구성하는 두 축 중에 하나를 그냥 없애버린 거지. 기둥 두 개로 지탱되는 지붕에서 기둥 하나를 없애버리면 지붕은 어떻게 될까?"

연구소장이 패닉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방금 눌렀더 버튼을 다시 눌렀어. 새까매진 창문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어. 그저 바깥에 존재하는 무를 덤덤하게 비출 뿐이었어.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면...."

 "이미 지붕이 무너졌는데 기둥을 다시 세워봐야 뭐할 거야? 우주는 이미 무너졌다고!"

연구소장은 몇 번 더 버튼을 깔짝거린 끝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어. 대통령이 다급하게 다가와 내게 물었어.

 "이봐요. 그럼... 그럼 지금 바깥은 어떻게 된 겁니까?"

 "바깥이라뇨?"

 "지금 이 건물 밖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건물 밖이라뇨. 각하, '밖'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

 "세상은 이 연구센터가 전부인 거죠."

난 손가락으로 디지털 스크린을 가리켰어. '우리 우주의 부피'를 나타내는 숫자는 더이상 '1'이 아니라 '0.000...1'이었어.

대통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멍청이를 입닥치게 한 것이 기뻐서 난 연구소장에게 다가갔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성공적으로 우주를 멸망시키셨네요. 축하드려요."

연구소장의 눈은 텅 비어있었어.

난 성취감을 만끽하며 이어폰에 손을 가져갔어. 바깥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줘야 할 말이 있으니까.

 "시뮬레이션 종료하시죠. 알아낼 거 다 알아냈는데."

그러겠다는 응답과 함께 난 깨어났어, 침대 위에서.

바로 옆에 흡족한 표정으로 서계시는 내 지도교수님께 난 한껏 웃어보였어. 진정한 기쁨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어.

 "대단하구만. 자네가 코 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네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것만 대단한가요?"

 "그래, 이론상으로만 가능했던 시간 정지를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한 것도 인상적이었어. 정말 인상적이었지."

교수님 곁에 서있던 논문심사관 중 한 명이 교수님을 팔꿈치로 쓱 쳤어. 교수님께서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면서 사과하셨어.

 "아이고, 죄송해라. 내가 말실수를 했네. 인상적이었습니다, 박사님."

동시에 교수님과 논문심사관들이 모두 박수를 쳐주었어. 난 기쁜 나머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 그 날 하루는 축하하는데 온전히 썼어.

그리고 다음날 박사학위증서를 내 자리에 올려놓을 때, 교수님께서 빙긋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어.

 "그 시뮬레이션 속 사람들 말이다. 그 사람들 보면 기분이 어땠니?"

 "음, 글쎄요.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세요."

우리 둘 다 실없이 웃으며 커피를 탔어.

 "내가 요즘 사회학 프로젝트를 하나 준비하고 있어서 말이야."

 "시뮬레이션 속 사람들 인권 같은 거라도 챙기시게요?"

 "음, 그건 아니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인간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는데 네 의견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가요?"

난 마지막으로 봤던 연구소장의 공허한 눈을 떠올렸어.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 그 멍청한 상황이 얼마나 웃겼는지를 제외하면 말이야.

 "글쎄요. 딱히 느낀 건 없어요. 어차피 전 그게 다 가짜라는 걸 알고 들어간 거였잖아요."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의심이 들지는 않았니?"

 "아뇨, 전혀요. 설마... 교수님 사이비 종교 믿으시는 건 아니죠? 시뮬레이션이 진짜 하나의 세계라거나 하는..."

 "이보세요, 박사님. 저랑 같이 학위 따시고도 아직도 절 그렇게 모르십니까? 전 무신론자에요."

 "역시 그렇죠?"

난 웃으며 교수님께 커피를 건넸어.

 "아무튼,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제가 죄책감 같은 거에 시달릴 줄 아셨어요?"

 "그것도 가능성 있는 가설 중 하나였지."

 "가설이 틀려서 실망하셨겠어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란다. 네가 박사학위를 따고서 시뮬레이션 속 사람들 때문에 가슴 아파 한다면 내 마음도 편치 못했을 거란다.

난 교수님의 뒷말을 어느 정도 예상했어. 언제나 다정하신 분이니까.

 "중요한 가설들은 다 맞았거든."

그래서 내 예상이 빗나갔을 때 호기심이 들었어.

 "중요한 가설이요?"

 "넌 시뮬레이션 속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여넘겼잖니. 그걸 보면서 의심이 들지 않든? 나도 혹시 시뮬레이션 속의 존재가 아닐까."

 "재밌네요. 매트릭스라도 다시 보고 오셨나봐요?"

 "아, 봤다마다. 보기만 한 수준이 아니지. 지금 이렇게 여기서 숨쉬고 있으니... 아니 숨쉬는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너한테는 의심할 기회를 참 많이 줬는데."

교수님은 웃고 계셨어.

 "아무튼 이걸로 내 실험도 성공이구나."

난 커피를 떨어뜨렸어.

 "시뮬레이션 종료하시죠. 알아낼 거 다 알아냈습니다."

교수님의 확신에 찬 음성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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