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건tom
조선후기까지 화폐는 상류층 내의 소비나 외국과의 무역 결제대금 등에만 사용되었으며, 일반 민간에서는 대동법의 대중화 전까지는 계속 쌀과 포목을 상품 화폐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식 경제체제에서 일반 백성들이 화폐를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도 재료부족 등의 원인이 있어서 액면가보다 실제가치가 높은 관계로 동전을 쓰기보다는 항아리에 담아서 묻어놓는 것이 더 이득이라 툭하면 전황이 발생하는 등 실제 유통거래에 쓰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화폐 유통이 부진했던 것은 조선의 경제 체제는 자영농의 육성과 안정적인 농업 가정의 구성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 농경 사회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유교 이념의 지향점이 이것이었으니 이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고, 전국의 장시 또한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 사회에서 부족한 것을 간단한 상거래를 통해 보충하는 정도의 역할을 했다. 이 수준에서 상평통보 또한 그 역할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예를 들어, 상평통보에는 2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통화가 통용되지 않았다. 5문, 10문전이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유통중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조선은 높은 단위의 화폐 거래가 부진했음을 암시한다. 1800년대에 고액 화폐의 유통에 대해서 조정에서 검토되었으나, 결국 실제로 시행된 것은 그 악명 높은 당백전이었다.
문명과 차단돼서 즈그들끼리 우덜식하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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