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광주에만 계엄군이 배치되었다는 좌좀에게 반박하는 자료.
2.당시 광주 시위대의 폭력성
당시 대학교를 지키던 공수는 11명으로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돌로 투석하자,지원을 요청 진압함.
물론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다소 심했다고도 볼수있겠으나,
이미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로 시위대를 "불순분자" 또는 "적"으로 규정했음.
또 시위대는 화염병,돌,계엄군의 무기를 빼앗는등 과격한 폭력시위를 벌임.
시위대가 총기를 가진 군인을 구타하고 , 총기를 빼앗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않으며,평범한 시위가 아님을 반증함.
3.전옥주의 선동사례
시신 2구를 리어카에 끌고 다니며 시민들을 선동
또한 전옥주 자신은 광주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도지사와의 면담을 요청.
면담을 하는 와중에도 시위대는 폭력시위를 멈추지 않았고,
전남도청에서는 서류상자,부상자,철수병력을 태운 핼기가 수시로 이착륙하고 있었음.
결국 계엄군은 철수를 약속함.(도지사와의 면담)
이러는중에도 시위대는 버스,트럭,장갑차등을 이용 계엄군을 위협하고있었음
결국 대대장이 참다 못해 군법회의에 회부되도 좋으니,발포하자 했지만
다른 대대장이 거절
4.가장 핵심적인 부분
21일 전남 도청 발포 상황
시위대가 계엄군의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진후 , 계엄군의 장갑차가 잠시 멈추자
이를 시작으로 대기중이던 시위대의 장갑차 및 버스등이 계엄군을 향해 돌진
일명:가미가제 (자살특공대)
계엄군 사망속출
계엄군 자위권 발동 사격
80년 5월 21일 도청앞은 오늘날 "다크나이트"를 방불케 하는 시위대의 의한
폭동의 현장이였음.
시위대는 계엄군을 향에 건물위로 올라가 계엄군을 저격 하고,
권총으로 쏘기도 하고, 엽총으로 장교를 사살하기도 함.
또 가끔 계엄군의 장갑차에 계엄군이 사망했다는 개소리를 하는 좌좀이있음.
밑에도 나와있지만, 폭도의 권총에 맞아 건물에서 떨어진 직후 아군(계엄군)의 장갑차에 순국함.
출처:2007년 국가진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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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당시 발생한 166명 민간인 희생자에 대하여 지만원씨는 약 80명은 모두 카빈, M-1등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들에 의해 사망했다고 하며, 공식 기록인 1980년 보안사, 사망자 실사보고에 의하면 M1,카빈 사망자가 94명이고, 1985. 10. 16. 국무총리가 국회에 제출한 답변자료에는 민간인 사망자가 총 166명(M16 29명, CAR 37명, 기타(총상) 67명, 타박상 15명, 교통사고 8명, 자상 8명, 미상 2명)으로 보고됐다. 즉, M1과 카빈에 사망한 사망자가 최소 37명에서 최대 94명이라는거다. 이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이 사람들은 폭도인가 희생자인가?
세째, 4.19는 이승만대통령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민주화 성과가 있었고, 6.10은 직선제개헌이라는 뚜렸한 민주화 성과가 있었다. 5.18의 성과는 도데체 무었인가? 왜 김대중은 최규하 정권과 국회가 합의한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서 광주지역의 시위를 격화 시켯는가. 이러한 정국혼란에 이은 5.18때문에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가 집권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 11대 총선에서 전두환의 민정당 호남지역 득표율이 57%로 부산의 58.1%와 거의 같았다는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도대체 5.18의 성과가 있기는 한건가? 1987년 노태우가 집권한 과정을 보면 민주화를 외쳤던 세력은 민주화운동을 한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 역사의 오점이라 생각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