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 피천득
(전문 : http://blog.daum.net/2losaria/15946032)
'또 한 해가 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인생. 우리가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은 그다지 애석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모歲暮의 정은 늙어가는 사람이 더 느끼게 된다. 남은 햇수가 적어질수록 1년은 더 빠른 것이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을 고쳐서 '인생은 사십까지'라고 하여 어떤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요, 사십까지도 아니라, 어느 나이고 다 살만 하다.
백발이 검은 머리만은 못하지만 물을 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온아한 데가 있어 좋다. 때로는 위풍과 품위가 있기까지도 하다. 젊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천하고 추한 것이다.
젊어 열정에다 몸과 마음을 태우는 것과 같이 좋은 게 있으리요마는, 애욕·번뇌·실망에서 해탈하는 것도 적지 않은 축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은 뒤에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에 넣으면 늙어가는 것도 괜찮다.
올해가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슬퍼할 것은 없다. 나의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내 병은 자기와 술 한 잔 마시면 금방 나 을 것이라고 하니, 그와 적조하게 지내지 않는 한 나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춘早春같은 서영이가 시집갈 때까지 몇 해는 더 아빠의 마음을 푸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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